【논설】 청주청년회의 역사적 의의

청주청년회는 1920년 6월 19일 창립총회를 열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3.1운동 후, 청주 지역에 교육 계몽과 사회문화운동을 통하여 점진적인 방법으로 독립을 쟁취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하며, 그것을 담당한 것이 청년회였다.  곧 청주 지역에도 이미 1910년 합방을 시작으로 무언가 지역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대하거나 그것을 주도하던 계층이 존재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청주청년회에서는 사회 문화운동을 지역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해 강연회, 토론회 등을 개최하거나 순회연극단을 구성하여 도내 순회공연을 하였다.

청년회의 강연회와 토론회는 가장 인기를 모으고 있던 프로그램이었다.  외부 유명 강사를 초빙하여 개최한 강연회. 같은 장소에 일반 청중들을 모아 하나의 주제를 두고 논쟁을 펴던 토론회 등은 교육기회를 갖기 어려웠던 청년들과 지역주민들에게 하나의 사회 교육적 의미를 주기도 하였다.  이들 프로그램이 봉건적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청주청년회는 사회 문화 운동사적인 의미에서 갖는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년회의 주된 활동으로는 위에서 든 강연회 및 토론회 외에도 청남학교 후원과 야학의 운영, 연극 공연, 체육활동 등을 적극 전개하여 나갔다.  청주청년회는 청남학교를 후원하며 민족의식이 강한 사립학교로 발전시켰고, 야학은 식민지 교육체제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적욕구를 충복 시켜줄 뿐 아니라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데도 주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극의 순회공연 및 체육활동은 지역주민들과 함께 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러한 활동은 지역 사회에 봉건성의 극복과 근대성 수용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체육활동은 청년회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다. 체육활동은 강인한 체력을 길러줌은 물론, 강인한 정신을 길러주고, 생활을 명랑하게 하는 사회 친교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므로, 청주청년회에서는 각종 체육활동 및 운동을 통하여 청년들에게 감투정신, 협동심, 책임감 등을 길러주고, 특히 민족적 단결과 일체감을 꾀하려 하였다.  이때의 체육활동으로는 축구와 야구가 성행하였는데, 이러한 청주청년회의 체육장려는 지역 사회에 근대체육을 보급,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고, 그런 점에서 청주청년회가 청주지역 근대체육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청주청년회는 민족진영의 언론사인 동아일보 청주지국을 경영하였는데, 이것은 그만큼 청주청년회가 민족운동의 중심에 서서 활동하였음을 말해주는 일이다.

그런데 1925년을 기점으로 청주청년회의 강령이 바뀌고 운동 방향이 달라졌다.  종래의 계몽과 실력향상을 통한 민족운동에서 1925년의 개정 강령으로 사회주의적 성격을 띤 사상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당시 일련의 급격한 사회 변혁가운데에서 청년들은 일제의 압박으로 인해 약해진 민족주의 운동 경향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25년 이후에는 청주청년회가 종래 지방유지의 후원을 받으며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청년들보다는 사회주의 운동이념을 표방한 혁신적인 청년층이 청년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시 풍미하던 여러 사회사상, 특히 일반적 현상으로 보이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상의 분화과정이 구체적으로 지역사회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좋은 사례이기도 한 것이다.

3.1운동이 일제의 강한 탄압으로 실패한 이후, 독립운동은 과격한 행동주의에서 일단 후퇴하고 실력양성과 점진적인 사회․문화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방향으로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전국 각지에 우후죽순(雨後竹筍) 격으로 청년단체들이 출현하고 있었는데, 청주 지방에서도 젊은이의 귀중한 가치와 자주적 역사의식을 인식한 청년들이 1920년 6월 19일에 ‘청주청년회’를 조직하여 사회변혁을 주도하려 노력하였다.

이 청주청년회는 개성의 신장과 민족의 역량을 배양할 것을 목적으로, 품성함양, 지성개발, 체육장려, 사회풍속개량 등을 4대 강령으로 채택하여 갖가지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청년회의 활동경비는 회원의 회비, 유지들의 후원금, 그리고 동아일보의 경영으로 인한 수익금 등으로 충당하였다.  그런데 이 청주청년회는 1925년에 청년회의 강령을 개정하여 사회 변화에 대응하며 노력하여 오다가 1928년경에 활동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청주청년회는 강영회 및 토론회 개최, 청남학교 지원 및 야학운영을 통한 교육 계몽운동, 각종 스포츠 보급 및 체육진흥활동, 연극공연, 동아일보 경영, 망선루 살리기 운동, 회보발행 등을 전개하면서 개인의 품성을 함양하고 민족의 역량을 강화시켜 나가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청주청년회는 1920년대 초에 일어난 전국적 민족대중운동인 민립대학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 등에도 적극 참여하여 후원하였던 것이다.

*全淳東「日帝强占期 淸州靑年會의 活動과 그 意義」, 『人文學誌』(忠北大學校) 第29輯(2004.12.)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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