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望仙樓 案內文
망선루(望仙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10호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남문로 1가
이 건물은 고려시대 청주 관아의 하나로 객관 동쪽에 있어 취경루(聚景樓)라 하였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환경 하다가 청주에서 기념으로 과거시험을 치르고 방(榜)을 이곳에 써 붙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후 퇴락했던 건물을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牧使)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편액을 망선루라 하였다. 그 후 목사 이섬(李暹)이 또 중수하는 등 근세에 이르도록 유지하다가 1924년 현재의 위치에 이건 되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목조 팔작 누각 형식인데, 현재는 1층 부분이 원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었으나 이 지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 忠北 淸州市 上黨區 南門路 1街 淸州第一敎會 構內에 망선루가 있던 시절의 안내문(1924~1999)
▲ 청남학교 교사 망선루 청주제일교회 구내 (1950년)
8. 望仙樓터 紀念碑文
이곳은 망선루 (望仙樓)가 있던 원래의 자리이다. 망선루(望仙樓)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건물로 당초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였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년)에 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까지 몽진하였다가 환도하는 도중 청주에 왔을 때 홍건적의 난리를 물리친 것을 기념하는 과거를 실시하고 이곳에 문과와 감시 합격자의 방을 붙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퇴락(頹落)해 있던 이 누각을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重修)하고 세조7년(1461년)에 한명회(韓明澮)가 편액을 고쳐 망선루(望仙樓)라 하였다. 그후 17세기에 목사 이섬(李暹)과 18세기에 목사 이수득(李秀得)이 중수(重修)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일제(日帝)가 무덕전(武德殿)을 지으면서 헐어 없애려는 것을 김태희, 함태영, 이명구 선생 등 지역의 뜻있는 분들과 시민들이 힘을 모아 1923년 제일교회 구내로 옮겨 세웠다.
망선루(望仙樓)는 수많은 시인묵객(詩人墨客)이 문장을 짓고 시국(時局)을 논하던 우리고장 문화(文化)의 산실이었다. 이건(移建) 전에는 청주보통학교 여자부 교사로, 후에는 청남학교, 세광고등학교 등의 초창기 교사(校舍)로 사용 되었으니 우리 지역 근대교육의 산실이 되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민족 교육의 산 징표(徵表)이다.
근자에 이르러 우리는 교육과 문화를 앞세우는 역사의 도시, 청주를 상징하는 건물 중의 하나인 망선루(望仙樓)를 원래의 자리인 이곳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復原)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애향심과 문화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심어주기로 하였다.
2000년 5월 5일
청주시․청주문화사랑모임조각 / 송 일 상문안 / 김 인 형, 한국지명학회
소재 :『忠北 淸州市 上黨區 北門路1街 (현존 “쥬네스” 자리)』
▲ 원래 망선루가 위치한 곳의 기념비 -청주 쥬네스 자리 (2000. 5. 5)
9. 望仙樓터 紀念碑文
제일교회 자리 이곳은 망선루(望仙樓)가 76년간(1923~1999년)옮겨와 있던 자리이다. 망선루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당초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였으며, 지금의 북문로1가에 있던 청주 객관 동쪽(옛 청주경찰서 터)에 있던 2층 누각이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조7년(1461년)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 망선루라 하였으며, 그후 몇차례 중수(重修)를 거듭하여 왔다. 이 망선루는 그동안 수많은 시인 묵객이 문장을 짓고 시국을 논하던 우리고장 문화(文化)의 산실이었다.
1921년 일제(日帝)의 무덕전(武德殿) 신축으로 망선루가 헐리어 사라질 운명에 처하자, 독립운동가이며 청주청년회 회장이었던 김태희 장로를 중심으로 함태영 목사, 이명구 선생 등이 주축이 되어 망선루 보존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청주청년회, 청남학교, 그리고 시민들과 기독교인들이 적극 동참하여 1923년 이곳 청주읍교회에 망선루를 이건(移建)할 수 있었다. 이는 청주지역 민간단체가 벌인 최초의 시민운동으로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여 이루어놓은 역사적 쾌거였다.
망선루는 일제 때에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상당유치원, 야학 등의 민족교육운동과 한글강습회, 각종 집회 및 강연회 등 사회운동의 장(場)으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세광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등 육영의 장소가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해 내었으니 민족운동과 교육운동, 사회 문화 운동의 요람으로 그 기능을 다하여왔다. 이로 미루어볼 때 망선루는 청주가 교육과 문화를 소중히 가꾸어온 역사적인 도시임을 웅변해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라 하겠다.
근자에 이르러 망선루가 노후하여 지탱하기가 어려워지자, 청주시민과 각 분야 단체들이 자라나는 세대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애향심과 자긍심을 갖도록 하고자, 망선루를 원래의 자리에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99년 10월 이 건물을 해체하여 청주시민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중앙공원으로 옮겨 세우게 되었다. 그간 일제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이기고 서 있었던 이 자리에는 그간 한결 같이 망선루를 지켜온 청주제일교회에 감사하는 마음과 선학(先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주시민의 뜻을 모아 이 비석을 세운다.
2000년 7월 1일
청주시․청주문화사랑모임조각 : 송 일 상문안 : 김 민 형․한국지명학회
소재 : 忠北 淸州市 上黨區 南門路 1街 淸州第一敎會 構內
▲ 청남학교였던 망선루터, 기념비 청주제일교회 구내 (2000. 7)
10. 복원된 망선루(望仙樓) 안내문
청주 망선루(淸州 望仙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소재지 :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이 건물은 고려시대 청주관아(淸州官衙)의 객사(客舍) 동쪽에 있던 누각 건물이다. 청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을 물리치고 궁궐로 돌아가다 청주에 머무른 기념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때 합격자의 방(榜)을 취경루(聚景樓)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누각의 이름을 고쳐 망선루라 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유지되다가 일제 때 무덕관 건축으로 철거되었다. 이에 김태희(金泰熙)가 중심이 되어 1923년 남문로 제일교회 뒤에 옮겨 교육 및 집회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 후 기둥이 심하게 부식 되어 붕괴의 위험이 있어 2000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옛 모습인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팔작지붕으로 새로이 복원 건립하였다.
* 현재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중앙공원 북편에 있음.
▲ 청주 중앙공원에 복원된 망선루 (200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