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선친(先親) 생각할 때마다 부끄럽습니다

어렵게 사는 독립투사 일석 김태희 선생의 후손


금년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己未年(기미년) 바로 그 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한 우국 선열들의 자취는 청주지방에도 수없이 널려있다.

의병장 韓鳳洙(한봉수)의 항일투쟁 활약상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빛나는 업적이요, 그 외에도 유명 무명의 구국열사가 민족의 恨(한)을 간직한 채 말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일석 김태희 선생은 청주가 낳은 애국지사요 충북교육을 제일 먼저 일으킨 선구자이다.

선생은 일찍이 광남학교를 설립, 젊은 청년들에게 조국정신과 개화사상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 후 청소년 중심의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단에 가입, 上海(상해) 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밀송하기도 했다.

선생의 한평생은 오로지 민족의 독립을 위한 荊棘(형극)의 길이었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기억에서 드높은 업적이 잊혀 가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선생은 1877년 음력 9월 12일 청주시 탑동 195번지에서 金亮秀(김양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漢文(한문)을 修學(수학) 한 그는 19세 되던 해 救國(구국)의 뜻을 품고 신학문을 배울 것을 결심, 당시 청주지방에서 선교활동을 벌이던 미국인 선교사 ‘밀러’ (한국명 민노아, 閔老雅)를 찾았다.

선생은 밀러 선교사로부터 서구문명의 새로운 지식기술을 배웠고 예수교 장로회의 장로로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개화사상에 자극된 선생은 청소년을 가르쳐야겠다는 꿈을 가지고 학교설립을 계획, 밀러선교사와 의논 끝에 方興根(방흥근), 金元培(김원배) 두 동지와 힘을 합하여 그의 나이 27세 때 광남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그 후 학교경영이 어려워지자 밀러 선교사와 합동경영, 밀러선교사는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고 선생은 學監(학감) 겸 理事(이사)로서 기독교계통의 청남학교로 재출발하였다.

일본인의 감시와 극심한 경영난으로 학교는 몇 차례의 폐교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선생은 불굴의 용기와 정열로써 모든 난관을 극복했다.

선생은 그 후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 隆熙(융희) 年間(연간)에 청신여학교를 설립했고 1921년에는 이를 6년제로 개편했으며 2년 후 청남학교에 여자부를 옮기어 남녀 공학제를 실시, 명실상부한 교육기관으로서 기반을 굳혔다.

선생은 충북에서 제일먼저 사학을 일으켜 젊은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한편 대동청년단에 가입, 상해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밀송했다.

3·1운동 때에 선두에 나서 만세시위를 지휘했던 선생은 일제의 어떠한 탄압에도 굴치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1921년 봄 고려조로부터 내려온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望仙樓(망선루)가 헐리고 그 자리에 武德殿(무덕전)을 신축할 때 골격보존에 뜻을 둔 선생은 헐릴 자재를 인수, 현재 청주제일교회 내에 재건하여 청남학교의 교실부족에 대처했고 청년회관 겸 공중집회소로 사용하게끔 배려했다.

1935년, 신탄진에 寓居中(우거중) 대홍수가 났다, 부락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을 때 선생은 물속에 뛰어들어 수백 명의 인명을 구하기도 했다.이와 같이 선생은 일평생을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바쳐온 荊棘(형극)의 길을 걸어왔건만 선생은 조국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1936년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이 선생에게 追敍(추서)되었고, 충청북도는 신탄진 공동묘지에 있는 선생의 묘를 鄕里(향리)인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 산 36번지로 이장, 선생의 높은 뜻을 추모하며 묘비제막식을 가졌다.

“의로운 일이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아버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늘 왜경에 쫓겨 다니셨으며 체포당하는 것만도 수차례나 보았습니다.”  선생의 아들 金基赫(김기혁)씨(청주시 사직동 354번지)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어릴 때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때 당시 독립투사의 2세들은 왜경의 눈초리 때문에 거의가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겨우 국민학교를 4년 중퇴한 뒤 남의 집 고용살이로 전전, 오늘날까지 집 한 칸도 마련치 못하고 남의 집 셋방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수년 전 가까스로 집 한 채를 마련했는데 사기꾼에게 속아 뺏겨버렸다고 김씨는 호소한다.

현재 남주동 자유극장 옆에서 춘광자전차점을 경영하는 김씨는 자전거 펑크나 때우는 일로 일곱 식구 먹고살기가 힘들단다.  더욱이 귀까지 멀어 남과 대화를 나누기도 힘든 처지어서 김씨의 마음은 마냥 안타깝기만 하다.  기미년(1919) 60돌을 맞아 아버지의 행적을 알기 위해 대학 도서관에서 한 달 이상이나 수천 권의 관계서적을 찾아보았다는 것이다.  “선친의 업적을 생각할 때 한낮 미미한 존재로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다”고 말하는 김씨는 “자식들이라도 훌륭히 키워 선친의 대를 이어 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충청일보』 1979.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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