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애국지사 김태희(金泰熙)
조 건 상 (전 충북대학 교수)
애국지사(愛國志士) 김태희는 단기 4210년(1877) 정축(丁丑) 10월 18일(음력 9월 12일)에 청주시 탑동에서 출생하였고, 호(號)를 일석(一石)이라 한다.
한학(漢學)을 닦았으나 신사상에 눈을 떠 일찍부터 기독교 신앙생활에 들었고 어려서부터 정의감에 불타는 우국지사였다. 그의 교육사업으로서 1904년 광무(光武) 8년(年) 노일전쟁기 11월에 동지 방흥근(方興根) 김원배(金元培)님과 더불어 방씨댁에서 광남학교(廣南學校)를 창설하고 15명의 학도로서 개교하며 이들 세 분은 솔선 머리를 깎고 학생들도 이에 따랐으니 청주에서 머리 깎은 사람의 가장 선구이었다.
학교경영이 곤란하여 보상계(褓商契)로 이관하였다. 1906년 병오년(丙午年) 수재로 학도들의 가정생활이 곤궁에 빠져 학교가 존폐의 기로에 서자 그는 감연(敢然)히 극복하여 교육 사업을 존속시키고 그 후에도 경영과 교육에 영일이 없었지만 성과 열로 끌고 나왔으며, 융희년간(隆熙年間)에 청신여학교(淸信女學校)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에 공헌하였다.
학교경영이 곤란하여 예수교장로회 청주선교부의 초대선교사 미국인 민노아(閔老雅) 목사와 상의하여 합동경영을 하게 되고 민목사(閔牧師)가 설립자 겸 교장이 되며 일석 김태희님은 교감 겸 이사가 되어 기독교 계통의 학교 청남학교(淸南學校)로서 출발하였다.
1923년 계해(癸亥) 봄에 학제의 변경으로 청남학교에 여자부를 옮기어 남녀 공학제도를 취하여 그가 청주를 떠나 신탄으로 이거할 때까지 예수교장로회의 장로로서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09年 기유(己酉)에 서울에서 청소년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秘密結社)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신백우(申伯雨), 신팔균(申八均), 곽재기(郭在驥), 민강(閔橿) 등 지사와 함께 활약하였으며, 1910년 경술이후(庚戌以後) 신백우님과 서로 국사를 위하여 밀모하였고, 1919年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에는 눈부신 활동을 하더니 1920년 경신이후(庚申以後)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연통제(聯通制) 실시에 있어 충청북도 참사(參事)로서 독립운동 국내공작에 힘을 기울였다.
충남 대덕군 신탄으로 이거(移居)하고, 흐르는 신탄강 물에 마음을 씻고 국운회복의 원동력으로 청년을 지도하고, 야학(夜學)을 일으키고 민혼(民魂)을 깨우치고 독립정신을 고취(鼓吹)하였다.
신탄진에서 우거(寓居)하는 중, 1936년의 대홍수시에 부락민 수백 명을 배로 건너 무사히 구제한 뒤에 자기는 마지막 배로 건너왔고, 장마 뒤의 구호에 갈력하여 지서와 면에서 양곡과 건축자재를 얻는데 일제하의 몰인정(沒人情)한 압정(壓政)을 뚫고 각 방면에 절충 투쟁하여 고애를 헤치어 각호마다 주택의 재건을 하게 하였다. 또 이 마을에 식수가 없음을 보고 샘을 파서 음료수를 해결하니 오늘날도 일동(一洞)이 기리고 있다.
이같이 그는 가는 곳마다 민족운동의 선구자로써 청년을 지도했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에 모범이었다.
1921年 신유년(辛酉年) 봄에 고려․조선 양조(兩朝)의 청주 최고건물(最古建物) 망선루(望仙樓)의 공매공고(公賣公告)가 호남일보(湖南日報) 지상(紙上)에 실린 것을 본 최창남(崔昶楠)님은 바로 일석선생(一石先生)께 기별 하였더니 곧 그는 청년회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여 입찰한 결과, 팔백일원에 낙찰되매 누각(樓閣)을 헐어 민영은(閔泳殷)의 서문동(西門洞) 밭에 쌓아 두었으니 이는 한국의 얼을 아끼고 고적보존(古蹟保存)에 그 뜻이 있는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중건(重建)하여 청년회관 겸 민립공회당으로 쓰랴 하였던 것이 중건비(重建費)가 없어 2년 반을 민씨(閔氏) 텃밭에 쌓아 두고 1923年 계해(癸亥)에 청남학교의 학급 증설과 교실 부족에 대책을 강구한 나머지 청년회 상무위원회 <이명구(李明求), 김철환(金喆煥), 윤태용(尹泰容), 이형재(李亨載), 권종만(權鍾萬), 김태희(金泰熙)의 제씨(諸氏)>를 열어 청년회관 겸 공중집소로 쓰는 조건으로 청남학교에 기증받아 그해 가을에 자재를 옮기어 오늘의 자리에 착공하여 1924년(年) 갑자(甲子) 구 월부터 교사로 쓰게 되었다.
이 망선루(望仙樓) 재건공사(再建工事)에 있어 그 비용도 막대하여 선교회의 약간의 보조이외(補助以外)에 삼천여원(三千餘圓)의 출연(出捐)에 의존하게 되니 오로지 그의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1933年 청남학교 30주년에 공로자로서 이사회는 그를 표창하였다.
신백우(申伯雨)님과 자주 만났고 대소국사(大小國事)에 연락이 있었다.
그는 신탄진 은거 중, 애국의 한을 품은 채 4269年(1936) 병자(丙子) 6월 26일(음력 5월 8일)에 장서(長逝)하니 향년(享年)이 60이었고 신탄강 강물도 울며 조상하였다. 그는 5남(五男)을 길렀으나 당시 형편으로 유해는 선영하(先塋下)에 안장되지 못 하고 신탄진 공동묘지에서 4278년 (1945) 을유년(乙酉年)에 광복을 맞이하였으니 기쁘다 못하여 강산도 유족도 또 한 번 울었으리라.
1959年 4月 6日 정인택지사(鄭麟澤知事)의 후의(厚意)와 필자(筆者)의 주선(周旋)으로 고산(故山)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로 이장하였다.
유족으로서 장남은 일본에 있고, 차남 기영(基榮)은 1950년 졸(卒)하고, 그의 둘째 자부(子婦) 문여사(文女史)가 4남1녀를 기르고 미망인(未亡人) 시모(媤母)를 모시고 청주에 거주하고 있다.
*『청주시지』(1961) pp. 313~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