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육으로 조국의 미래 밝힌 선각자

8. 교육으로 조국의 미래 밝힌 선각자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설립하고, 상해 임시정부 충북 참사로 활약.

 

一石 金泰熙 (1877~1936)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들었을 때 언뜻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이름자보다는 청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청남학교 설립자, 청주제일교회 장로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많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구한말 쓰러져가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독실한 신앙과 교육을 통하여 독립운동을 부르짖은 그는 죽는 날까지 조선의 명예로운 광복만을 손꼽아 갈망한 자랑스러운 충북인이다.

1904년(광무8년) 노․일전쟁으로 안팎으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27세의 젊은 청년 김태희는 드디어 자신의 꿈을 실천하는 일보로 광남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때 평생을 그와 뜻을 같이한 방흥근, 김원배 동지와 함께 이 고장 최초의 사립학교인 광남학교(현 청남초등학교 전신)를 열고 첫 입학생으로 15명을 맞이한다.  입학식을 하던 날 김태희는 학생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조선의 자주독립은 학생제군들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촌음을 아껴 여러분들의 실력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이렇게 의욕적으로 출발한 청남학교는 그후 순탄한 과정만을 밟지는 못했다.  몇 번의 경영난도 걸림돌이 됐지만 무엇보다도 왜경의 탄압이 견디기 어려웠다.

모든 난관을 극복한 그는 여성교육에도 눈을 돌려 청신여학교를 설립한다.  그때가 1907년(융희1년) 실로 시대적․지역적으로 폐쇄적인 이 지역에서 여성을 위한 교육을 해야 한다는 생각자체가 혁신적인 것이다.  그만큼 청신여학교는「여성도 배워야 한다는」것을 사람들의 의식을 뒤바꿔 놓는 계기가 됐다.  그 후 청신여학교는 학제 개편에 따라 청남학교와 병합하게 되지만 「암울한 시대 여성들도 배워야 진정한 자주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선각자적인 생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의미가 크다.

1909년 그에게 있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시점으로, 서울에서 청소년이 중심이 돼 조직된 비밀결사 단체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한다.  이때 신팔균, 곽재기, 민강 등 이 지역 출신의 우국지사와 함께 주로 지하공작을 맡아 최전선을 맡아 활동하는 동지들의 정신적 버팀목으로서 위치를 차지한다.  그 후부터 그는 박경학 동지와 함께 독립자금책을 맡아 군자금 밀송에 최대한의 심혈을 기울였다.“할아버님께서는 대규모 양봉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돈은 상해 임시전부로 보내졌다는 할머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덕분에 “우리 가족들은 피죽으로 연명해야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매일같이 일경의 사찰을 받아야만 했다 합니다.”

이러한 그의 숨은 공적이 상해임시정부 독판부에 전달돼 충북지역 독판부 참사라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아 독립군의 젖줄 역할을 했다.

한편 그의 남다른 애국심은 전통 문화유적의 보존에 있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부분에 대해 김홍장(손자)씨는 “1921년이라고 합니다.  그때 청주에서는 가장 오래된 고려 때 지은 망선루가 헐릴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이때 할아버지께서는 분연히 일어나 차라리 헐 바에는 청년들을 위한 도장으로 만들 것을 주장 지금의 청주제일교회 구내에 새롭게 재건하셨다고 합니다.”

▲ 김태희 선생 손자 김홍장

▲ 김태희 선생 손자 김홍장

지금은 당시 쩌렁쩌렁한 선생의 음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망선루 디딤돌에 스며있는 그의 애국 혼을 느낄 수 있다.

1927년 12월 청주 신간회 조직의 주역이었던 선생이 갈수록 일경의 집요한 추적에 몸을 피하기 위해 활동거점을 신탄진으로 옮긴 그는 1935년에 일어난 대홍수에서도 손수 발 벗고 나서 많은 인명을 구하고 홍수로 폐허가 된 주거지 재건 활동에도 아낌없는 동족애를 발휘하였다.  평생을 ‘의(義)’ 하나만을 고집하며 살아가던 그가 1936년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못 본 통한을 품은 채 신탄진에서 장서(長逝)했다. (金廷浩 記者)

*『동양일보』 1992.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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