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立大學設立運動)
▲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 창립총회 (1923년)
일제(日帝)의 기만적인 문화정치의 속셈을 알아차린 우리 민족의 지도자와 민중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한 방안으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는 1920년대 민족운동 중 중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당시 우리사회에서 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전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우리의 교육수준이 국내에 대학을 가질 정도에 미쳤다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의 민력(民力)이 이것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이고, 셋째로, 대학교육을 통하여 우리의 손으로 지도적 인재를 길러내자는 것이고, 넷째로,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민족정신을 높이고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희망과 긍지를 주는 것이 큰 수확이 된다는 것이다.
1920년 6월 23일 구한국(舊韓國)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이상재(李商在)·윤치호(尹致皓) 등 민족운동가 100여명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 설립발기회를 개최하여 민립종합대학 설립을 결의한 것이 민립대학설립운동의 최초의 일이다. 이와 같이 결성된 민립대학 기성준비회에서는 기성회 조직을 위하여 전국 각지에 위원을 파견하여 발기인 모집활동에 노력하였다. 특히 언론기관과 각 지방 유지들의 성원에 힘입은 준비회에서는 1923년 1월 9일 “근고 이천만 부모형제자매(謹告 二千萬 父母兄弟姉妹)”라는 제목으로 발기인 선발요령으로 삼개항목으로 정하여 전국각지에 발송하여 그 박차를 가하였다.
一、발기인은 1군에 2인 이상 5인 이내로 선정하시되 그 자격과 방법은 각 군에 일임함. (但 郡內 各團體協議 選拔하심을 요함)
一、당선된 발기인은 별지(別紙) 승낙서(承諾書)에 주소, 씨명, 연령을 기입 날인하여 본회로 송부하시고 발기총회에는 반드시 출석 하시옵소서.
一、발기 총회 시 발기인의 경성 체류 중 숙사료는 본 준비회의 부담으로 함.
민립대학 기성발기총회는 순탄히 진행되어 준비회가 조직된 지 4개월여 만인 1923년 3월 29일 오후 1시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발기인 1,170명중 462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되었다.
지역별 발기인 씨명 중 청주의 씨명은 다음과 같다. 충북청주군(忠北淸州郡) 민영은(閔泳殷), 정규택(鄭圭澤), 김원근(金元根), 김태희(金泰熙), 나인자(羅寅慈).
*『東亞日報』 1924. 10.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