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망선루와의 만남
김 홍 장 (일석 2대손)
金 弘 長 (一石 2代孫)
은사 최동준 장로님(전 세광고 교장)과의 만남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독립운동가 일석 김태희(一石 金泰熙)님은 나의 조부님이신데, 조부님의 영정을 전해 드리려고 은사님과의 약속장소에 도착하였다. 최장로님은 어느 귀하신 장로님 한 분을 모시고 오셨다. 전순동 장로님이시다. 조금 전에 도착한 친구 박명숙 사장은 화합의 명수답게 금방 방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다.
은사님이 모시고 온 전순동 박사님은 처음 뵙는 분이지만 조금도 부담이 가지 않았다. 첫 인상이 아주 온화하고 인자함을 풍기었으며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화제를 이끌어 나가셨다. 나는 주로 조부님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입장이었으나 전에 몇 번 있었던 매스컴 인터뷰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아는 대로 조부님에 관하여 말씀드렸다. 이런 때면 늘 느끼는 일이지만 나 자신 조부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어 아쉽게 생각되며 상대방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한다.
화제가 자연 망선루로 돌아갔다. 망선루라면 나도 그런 저런 이야기꺼리가 많아 순간 생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망선루’ 이 세 글자는 오늘 나에게 많은 것을 알게 하였고 또 너무도 많은 것을 안겨다 주었다. 일제(日帝)의 훼손으로 망실되어질 뻔하다가 조부님을 비롯한 선각자들에 의해 청주제일교회 구내에 복원되어 배움의 터가 된 망선루! 나와 망선루와의 만남은 전적으로 조부님의 크나큰 업적의 후광에 의한 것이었다. 망선루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선 유일한 나의 배움의 터가 되었고, 그 곳은 또한 고난 가운데에서도 배워야겠다는 향학열에 불타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다 준 배움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더욱이 이곳을 거쳐 간 젊은이 가운데에 단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각자 영역에서 성실히 나름대로 열매를 맺고 있으니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라 생각하여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6․25 동란기 망선루에서의 학창생활은 단순한 배움에 그치지 않고 끈끈한 서로의 우정을 가슴속 깊이 듬뿍 안겨다 주기까지 하였다. 이 끈끈한 정은 마음과 마음, 믿음과 믿음으로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동문모임"을 낳게 하였고 드디어는 은사님을 모신 가운데 너무도 큰 선물을 나에게 안겨다 주었다.
그렇게도 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허덕거리던 늦겨울이 지쳐 있을 즈음 따스한 봄볕이 온 세상을 어루만져 주는 3얼 16일 오후, 나는 조용한 자리에서 훌륭한 두 분 선생님으로부터 망선루 역사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들추며 이야기의 꽃을 피워 나가고 있었다. 순간 가슴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한순간 왈칵 치밀어 나의 가슴을 강하게 누르는 것이 아닌가…… 아! 망선루! 나에게는 그저 엄청나게 굵은 기둥으로 지어진 옛날 고옥으로만 기억되던 그 건물! 일제(日帝)에 의해 헐린(1921년) 청주의 상징이기도 한 이 건물이 조부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노력으로 이곳 남문로 1가 청주제일교회로 옮겨져(1924년)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또 그 숱한 세월동안 묵묵히 젊은이들의 희망의 보금자리로 그 몫을 다하여왔다. 그러나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랜 세월을 겪는 동안 힘을 다하여 한 쪽으로 기울어 그 명을 다 하는가 했더니 옛 선현들처럼 이 고장을 사랑할 줄 아는 시민들의 노력으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중앙공원 북편에 옮겨져(2000년) 그 늠름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다. 그 곳의 망선루는 오늘도 양지바른 곳에서 지난날 숱한 옛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시민들과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망선루에 관한 나의 많은 추억 중 한 가지 잊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신현주 교감 선생님으로 부터 망선루에서 배운 첫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유일한 가곡 “이별의 노래” 던가 그 제목은 분명치 않으나 “서편의 달이 호수 가에 질 때에………”로 시작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내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한가로이 혼자서 운전을 할 적이나 왠지 허전하고 울적할 때 곧잘 부르는 노래가 되었으며 언제나 나의 가슴속 깊이 자리하고 아름다운 추억에 젖어 들게 하곤 한다. 피아노는커녕 풍금도 없이 육성으로 가르쳐 주시던 신현주 교감 선생님의 그 때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청신고등공민학교의 선생님들은 묵묵히 온 정성을 다하여 한 자라도 더 가르쳐 주시려고 노력하여 주신 덕택으로 우리들은 그나마 한문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는 물론 아버지 할아버지의 함자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무덕전 자리에서 옮겨 온 망선루는 우리의 배움터 청신고등공민학교가 출범하기 전, 청남학교 교사로서, 최초의 여학교 청신여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하는데, 일제의 압제 가운데에서도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우려는 선현들의 지혜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숭고한 정신의 발로였을 것이다. 우리들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그나마 전기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야간에 공부를 하였지만 일제시기에 배움을 불사르던 선배들은 아마도 호롱불 밑에서 피로한 눈을 비비면서 한 자라도 더 배우려고 몸부림쳤으리라. 더욱이 여성들의 배움에는 의당 따가운 눈총을 집 안팎에서 강하게 받았을 것을 생각하니 그 불굴의 의지에 숙연해진다.조부님을 비롯한 여러 선구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깊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망선루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청신학교를 졸업한 후 세광고등학교에 진학함으로써 망선루 바로 2층 교실에 들어서게 되었다. 망선루와의 헤어짐이 불과 2년 후 다시 해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나는 망선루와 두 번째 만남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어찌 우연의 만남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아니 두 차례에 걸친 망선루의 생활이 나의 학창생활의 전부이고, 그곳에서 나의 인생관·신앙관이 확립되었음을 생각하면, 조부님은 지하에 계시지만 언제나 나의 배움의 길을 이끌어 주신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조부님이 그토록 애지중지 하셨던 그 건물에서 손자인 내가 꿈과 희망을 펼치며 자라왔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 당시는 철부지라 잘 몰랐으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망선루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기만 하다.
세광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기에 1주일에 1시간의 성경공부시간이 있었다. 교목님이 따로 계셨고, 목사님의 성경 공부 시간의 한 말씀 한 말씀은 나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가운데에도 오늘날 나의 신앙생활에 적지 않게 영향을 준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어린 아들이 지붕 위에 올라갔는데 사닥다리가 없어서 내려올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는 그 곳에서 그만 울고 말았다. 그 광경을 본 아버지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애야 이 아버지의 가슴으로 뛰어 내려라”고 크게 외쳤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그냥 계속 엉엉 울고만 있었다. 아버지가 다시 “아무런 걱정 말고 아버지를 믿고 뛰어 내려” 하고 다시 큰 소리로 외치자 그때야 비로소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아버지의 가슴을 향하여 펄쩍 뛰어내려 무사히 아버지의 가슴에 안겼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씀은 신앙의 문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의 문턱 너머로 인도할 수 있는 구절로, 학창시절 들었던 설교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매일 30분간씩 있었던 기도시간에 오르내리던 계단, 또 내가 졸업식을 하던 교회 예배당, 학창시절 한동안 매일 같이 새벽예배를 드리던 그 곳 청주제일교회는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어 감회가 새롭다.
고등학교 시절 교문 맞은편에 서 있던 고목은 이제 간 데 없고, 숱한 고난의 자국도 말끔히 씻어진 망선루의 옛 터에 서서, 나는 어려웠던 시절의 배움을 회상하며 잠시 상념에 잠겨본다. “지난 과거에 대한 되새김이 없는 생활은 하느님의 섭리에 눈이 어두워지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려니………” 놓치기 쉬운 지난 학창 시절 하느님의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어 본다.
2001년 10월 16일
*『忠北基督敎歷史硏究會報』 第10號(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