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창기 청남학교 학생과 선생님 (1910년)
1) 청남학교(淸南學校)의 설립
19세기 말 복잡한 국내 정세와 외부 열강의 패권 쟁탈이 중첩된 가운데, 조선정부는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봉건적인 전통사회를 타파하고 정치·경제·사회·교육면에서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여 나갔다. 정치적 개혁으로, 우선 자주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지기 위하여 개국년호(開國年號)를 사용하였다. 그 동안 구별이 분명하지 않던 행정부(行政府)와 궁내부(宮內府)를 분리하여 행정부는 의정부(議政府)와 8개 아문(衙門)을 두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리고 지방은 과거의 8도를 23부로 나누었다가 2년 뒤에 13도를 두었으며, 도의 지방장관으로부터 사법권, 군사권을 독립시키고 경찰권도 일원화하였다.
그러나 이 때 무엇보다 특기할만한 일은, 교육부문에 있어서 일대 개혁이 이루어진 사실이다. 종래 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예조(禮曹)를 학무아문(學務衙門)으로 개칭하고, 학무아문고시(學務衙門告示)를 발표하여, 정부는 소학교와 사범학교를 설치하고 반상(班常)의 구별 없이 교육을 보급하겠다는 이른바 기회 균등의 원칙을 밝혔다. 이어 1895년 2월 고종황제는 일종의 교육입국(敎育立國) 조서(詔書)인 교육조서(敎育詔書)를 전국에 내려, 근대 교육을 통하여 근대국가로 중흥하겠다는 의지를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이에 의하여 『한성사범학교관제』『외국어학교관제』『소학교령』등을 공포하여 신 학제에 따른 학교를 설립하여 나갔는데, 이 소학교령에 의해 1895년, 서울에는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와 장동(壯洞)·계동(桂洞)·정동(貞洞)·주동(紬洞)등의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청주에서 제일 처음 설립된 관립 초등학교는 융희 원년(隆熙 元年)에 건립된 청주보통학교이다. 이 학교는 구한국 학부령에 의해 청주 군청 부속 건물에서 개교한 후 12월에 새로운 교사를 지어 이전하였으며 1937년에 영정공립보통학교(榮町公立普通學校)로 개칭되었고 1943년에 청주주성국민학교(淸州舟城國民學校)로 그 교명이 바뀌어 오늘의 주성초등학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청주보통학교보다 앞서 이미 청남학교(廣南學校)가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 청남학교는 민족적 기운이 팽배하던 1904년, 김태희(金泰熙)·방흥근(方興根)·김원배(金元培) 등 교육구국의 이념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방흥근의 사저에서 ‘널리 인재를 모아 교육한다’는 뜻에서 광남학교(廣南學校)로 출발하였다. 방흥근의 사저가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대표격인 학교장은 김태희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다. 이 학교는 개화사상에 의해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근대 학교의 효시(嚆矢)이다.
그 후 이 학교는 1908년 교명을 청남학교(淸南學校)로 바꾸어 청주지역 민족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청남학교는 일제 치하에서 신사참배의 문제로 1936년에 일시 휴교처분을 당하였고, 시세의 질곡으로 학교명이 1945년 4월 1일 잠시 성남학교(成南學校)로 개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공립학교가 되면서 민족 교육의 보루로서의 역사와 전통을 되살리기 위하여 ‘청남’이라는 학교명을 다시 환원하여 되찾게 되었고, 그것이 현재 청주시 영운동에 위치한 청남초등학교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지금도 청남초등학교는 해방 전 청남학교의 학적부와 졸업대장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어쩌면 공백으로 돌아갈 뻔한 일제기 청주지역에서의 민족적이고 근대적인 학교교육의 면모와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학교의 설립과정을 보면, 제일교회 청년인 방흥근․김태희․김원배 등에 의해서 광남학교(廣南學校)가 설립되었다. 당시 양봉으로 비교적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던 방흥근은 제1차 한일협약, 러일전쟁 등으로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어 가고 있던 당시, 김태희․김원배 등 우국지사들과 함께 구국의 길은 교육에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손을 잡고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방흥근은 자신의 사저를 학교로 사용하도록 제공하였으며 대표격인 학교장은 김태희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다. 처음 설립당시 15명의 학생이 모였으며 이들을 두 개 반으로 나누어 2개의 방(교실)에서 교육하였다. 교회 및 서양 선교사의 청주 활동으로 새로운 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그 동안 서당에서 유교 경전 중심으로 공부하던 사람들이 새 학문과 개화사상을 지향하는 근대적인 학교에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개설 초창기 학교 운영이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교육구국의 일념을 가지고 방흥근의 재정적 후원 하에 선뜻 학교를 개설하기는 하였으나 학교 운영에 있어서 차츰 재정적으로 어렵게 되어 갔다. 더욱이 통감부는 1908년 8월『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공포하고, 모든 사립학교는 설립 요건을 갖추어 인가를 받은 후 학교를 운영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것은 민족교육의 온상지가 되어 있는 사립학교에 대한 탄압과 신규설립을 억제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때에 청주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펴고 있던 민노아(閔老雅 : F.S. Miller) 선교사가 그들을 도와주었다. 당시 우국지사와 청년들은 왜경의 감시를 벗어나 회합하는 유일한 장소로 청주읍교회를 이용하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밀러 선교사는 학교 운영자 및 젊은 청년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었으며, 학교의 사정도 자연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서울의 경신학교를 운영한 경험이 있어 교육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교회 청년들이 건전한 뜻을 가지고 운영하는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우며 협력하여 주었던 것이다.
1908년, 평소 교육 사업에 뜻을 두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선교부의 후원을 받아 보부상 조합으로부터 기와집으로 된 학교건물을 매입하여 학교 운영권을 인수받았다. 이 당시의 상황을 선교사 보고서에서는
약 5년 전에 교회 옆에 한 오래된 건물에서 학교가 시작되었는데 벽은 금이 가고 마루바닥에 구멍이 나고 지붕도 새는 낡은 건물이었다. 하나뿐인 조명도 한지 바른 격자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뿐이었다. 여기서 매일 한 명 또는 어쩌다 두 명의 선생들이 배움에 목마른 20내지 30명의 남자 아이들을 가르쳤다. 작년에 마을에서 건물 한 채를 구입하였는데, 200달러를 지불하였고 교회에서 50달러를 보탰다. 흙벽이지만 4개의 방이 있고 높은 건물에 유리창문이어서 빛도 잘 들어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동년(1908)에 구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정식으로 사립학교 설립허가를 받게 되었다. 학교 이름을 청남학교(淸南學校)로 개명하고 장로교회인 청주읍교회에서 인수하고 민노아 선교사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남학교는 기독교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청주지역 민족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종교계 사립학교로서 정식으로 인가도 얻고, 또한 종래 2개 밖에 없던 교실을 4개로 확대하여 학교 면모를 갖춘 청남학교는 1909년에 정식으로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치하여 교육하였다.
2) 학교운영
민노아, 계군, 소열도 등 선교사들이 교장직을 이어 맡고 있었으나, 이것은 형식상이었고 실제로는 한국인 교사가 교감직을 맡아 실제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감직은 김태희, 최창남 등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그 교육의 방향은 한결같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이었다.
청남학교는 1921년 학제가 바뀌어 4년제에서 6년제가 되었고, 1923년에는 여자 학교인 청신여학교(淸信女學校)와 합쳐 남녀 공학의 학교가 되었으며 1924년에는 망선루로 교사를 이전하는 등 그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3) 망선루의 이전과 교육의 활성화 (望仙樓의 移轉과 敎育의 活性化)
처음 방흥근의 사저에서 시작한 청남학교는 1908년에 청주읍교회 내에 새로 교사를 신축하여 학생을 모집하였으며 1923년에는 망선루가 이곳(청주읍교회 구내)에 새로이 복원되고 그 이듬해 곧 1924년에 청남학교의 건물로 사용되어, 1938년 현재의 청주시 영운동 청남초등학교 자리로 옮기기 전까지 망선루는 많은 인재를 배출한 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이 망선루는 현재 옛 청남학교의 자리인 청주시 남문로 1가 청주제일교회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유서 깊은 문화재이다.
1921년, 현 도청 서문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도로 확장공사와 일본 경찰서 내 일본인의 검도와 유도를 연마하는 무덕전(武德殿) 신축으로 역사적인 망선루(望仙樓)가 헐리게 되었다. 그 당시 망선루는 청주 여자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역사적인 건물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당시 청주청년회 회장이요, 청주읍교회 장로인 김태희는 우리문화 유산인 망선루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냥 그대로 헐리어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격하고 이 건물을 옮겨 민족문화 유산을 잘 보존함과 동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방안을 세웠다. 그는 김종원(金鍾元)․김정현(金正賢)․이호재(李鎬宰) 등 민족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교회 청년들과 망선루를 살리기로 결심하였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대금은 유지들이 조달하고 그 이전 작업은 청년회가 책임을 지며 그 건물은 청주읍교회 구내에 복원하고 동시에 학교 건물로서 활용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고적 보존을 명분으로 하여 충청북도경찰국으로부터 수의 계약으로 2천원에 망선루를 인수하고 조심스럽게 건물을 철거하였다. 헐린 건물에서 나온 목재며 기와들을 모아 옆 골목 공터에 쌓아 두었다.
일단 인수는 맡았으나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간이나 복원사업이 추진되지 못한 채, 자재들은 공터에 방치되고 있었다.
김태희 회장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복원 문제에 대해서 청주읍교회와 본격적으로 협의에 나섰다. 그 내용은 방 한 칸은 청년회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남학교 교실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김태희 회장은 청남학교 학감이라는 직분을 맡고 있었고, 때마침 청남학교는 청신여학교를 합병하여 교실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청주선교부 및 교회와의 교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마침내 교회로부터 동의를 얻고, 장소가 물색되었다. 이에 총 공사를 책임지고 진두지휘하던 김태희 장로는 시내 인천목재상(仁川木材商)에 의뢰하여 신의주에서 목재를 주문하여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자금도 부족하고 그 자재도 그렇게 여의치 못하였다. 그래서 원 자재의 썩은 부분은 잘라 내고 새로 가져온 목재를 잇대어서 기둥으로 새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재 망선루 기둥이 대체로 많이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복원 공사가 진행될 때 청남학교 학생들은 방과 후에 노력 봉사활동에 나섰다. 민족 문화 보존이라는 차원과 자신들이 사용할 교실을 짓는 일에 손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이 교실 신축 공사에 직접 참여하였다.
이 공사는 단순히 공사 인부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학생들의 수고와 땀방울이 초석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마침내 1924년, 상량식이 이루어졌다. 그때에 김태희(金泰熙)· 이동현(李東鉉)·이명구(李明求)·정규택(鄭圭澤)·김철환(金喆煥)·박경학(朴敬學)·김택(金澤), 청년회원 및 다수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복원된 망선루는 길이 64자, 폭 28자,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에 약 50여 평 면적을 차지한 2층 건물이다. 이 망선루는 본래 위층 아래층이 툭 트인 2층 누각이었으나 이 건물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학교 교실로 사용할 목적이었기 때문에 1·2층의 사면 공간을 벽돌로 막고 창문을 내었다. 그리고 목재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만들었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조선식 건축양식을 갖추고 있으나 내부 구조는 2층 양옥집과 별다름이 없게 되었다.
마침내 1924년 9월 청남학교가 이 망선루로 이사하여 온전한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아래층 중앙에 교무실을 두고 양쪽 동서로 교실을 배치하였으며, 2층에 3개 교실을 마련하였다. 이곳으로 모든 시설을 옮김으로서 학교 면모를 일신하였다. 다만 청년 회의실은 아래층 북편으로 별도로 입구를 내어 사용하였다. 이곳은 당시 유일한 청주 남녀 공학의 사립 초등학교로서, 근대적인 초등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이리하여 청남학교는 민족의식 고양과 사회계몽을 도모함으로써 일제기 근대 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주지역의 계몽과 구국운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 全淳東 「日帝期 淸州地方의 民族敎育運動 -淸南學校를 中心으로-」 『中原文化論叢』 第2․3合輯(1998)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