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대적 배경
구한말의 한반도는 중국, 러시아, 일본의 각축장(角逐場)이었다. 1895년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고, 완전히 일본의 독점적(獨占的)영향권 아래 들게 되었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통하여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統監府)를 두어 한국 정부를 직접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반도 점령 의도를 드러냈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과 뜻있는 인사들이 이에 항거(抗拒)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이 무렵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기독교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때 교회는 양반 토착 지배세력의 횡포로부터 민중이 보호받을 수 있는 피난처로서 새로운 구원의 길로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신진 세력에게 새로운 가치와 활동 공간을 제공하였다.
김태희는 1900년대 초부터 1930년대까지의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을 이끌어 간 대표적 인물일 뿐 아니라 사회사업, 교육사업, 문화사업 에도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877년 청주시 탑동에서 출생한 일석(一石) 김태희(金泰熙)는 일찍부터 신학문에 접하고 근대 문명에 눈을 뜬 지식인이었다. 그는 구한말 위기에 빠진 조선사회를 구하는 길은 교육 사업에 있다고 보고 1904년 청주제일교회 청년 방흥근, 김원배 등과 함께 사립 광남학교를 설립,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1907년 청신여학교를 설립, 여성근대교육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1908년 미국인 선교사 민노아와 협력하여 광남학교를 청남학교로 개칭, 더욱 발전 시켰으며,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1920년 청주제일교회 장로가 되었다.김태희는 한일합방 이후에도 교육구국에 대한 열의를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그 결과로 1921년 청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문화재인 망선루가 철거될 위기에 빠지자 사재를 들여 이를 인수, 청주제일교회 내로 이전하여 재건하는 동시에 청남학교의 교사로 사용하게 하는 열의를 보였다. 또한 1923년 일제의 우민화교육정책에 대항, 전국적으로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벌어지자 청주지역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우리지역의 근대 민족 교육운동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김태희(金泰熙) 장로는 교육운동 뿐 아니라 일제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구국투쟁에도 앞장선 민족 운동가였다. 일찍이 신백우(申伯雨), 신팔균(申八均) 등과 함께 1909년 대동청년당에 가입, 항일활동을 시작한 그는 교회 내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고, 3․1만세운동 당시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이후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국내 비밀조직인 연통제의 충북 책임자를 맡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1927년 일제하 최대 항일운동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신간회 청주지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어 1931년까지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쳤다.
2) 청남학교(淸南學校)와 민족교육(民族敎育)
청남학교는 개화사상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학문을 지향하는 민족 기운이 팽배하던 때, 1904년 11월 1일, 방흥근(方興根), 김태희(金泰熙),김원배(金元培)등 젊은 우국 청년들에 의하여 광남학교(廣南學校)로 출발하였다. 교육구국의 이념아래 널리 인潁?구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처음 방흥근의 사저가 학교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대표의 격인 학교장은 김태희(金泰熙)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여 나갔다. 이 학교는 개화사상에 의해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는 청주지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으로서 근대 학교의 효시가 되었다.
처음 설립 당시 15명의 학생으로 출발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던 시기였기에, 그간 서당에서 유교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새 학문과 개화사상을 지향하는 근대적인 학교로 찾아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지만, 개설 초창기 학교 운영이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교육구국의 일념을 가지고 방흥근의 재정적 후원 하에 선뜻 학교를 개설하기는 하였으나, 학교 운영 면에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때에 청주읍교회를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펴고 있던 민노아(閔老雅)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평소 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민노아 선교사는 교회 청년들이 건전한 뜻을 가지고 운영하는 학교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우며 협력하여 주었다.
그 후 1908년, 이 학교는 청주 선교부 명의로 구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정식으로 사립학교 허가를 얻어 학교명을 청남학교(淸南學校)로 개명하고 청주읍교회에서 인수하였다. 설립자 겸 교장으로 민노아 선교사가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청남학교는 미국 북장로회에 소속되어 청주읍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 청남학교 제 16회 졸업생. (일석 김태희 선생의 2남 김기영, 앞줄 좌측 첫번째, 1926년)
청남학교는 1921년에 학제가 바뀌어 4년제에서 6년제가 되고 고등과를 설치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여자 학교인 청신여학교(淸信女學校)를 합병하여 남녀 공학의 학교가 되었다. 1924년부터는 이전된 망선루(望仙樓)를 교사(校舍)로 사용하여 교육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그런데 학교운영에 있어서, 민노아, 계군, 소열도 등 선교사들이 교장직을 맡고 있었으나, 이것은 형식상이었고 실제로는 한국인 교사가 교감직을 맡아 실제 운영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교감직은 일제기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가 폐교되기 전까지 처음에는 김태희 그 다음에는 최창남(崔昶南)으로 이어지고 있었는데, 애국정신이 투철한 교사들과 함께 폭넓은 민족교육을 심화하여 갔다.
1930년대 중엽, 일본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을 때, 청남학교는 이것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일본이 1935년에 들어와 대륙 침략 정책상 강력한 황민동화(皇民同化) 정책을 내세워 민족문화 말살에 적극성을 보이면서 기독교 학교에까지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자, 청남학교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을 고수하여 나가려 애썼다.
민족의식과 항일 정신이 강한 청남학교는 1936년, 일제가 강요하던 신사참배에 거교적으로 반대하여, 1936년 10월 2일 당국으로부터 휴교 처분을 당하고 말았다. 이때에 신사참배에 불응한 정규태(鄭奎泰)․정순경(鄭順敬)선생은 옥고를 치르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으며, 박종렬(朴鍾烈)․강병찬(姜炳瓚)․박복만(朴福萬)․이종호(李鍾好)등 주동학생은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여러 가지 갈등 가운데에 결국 당국에 순응하고 8일 만에 다시 개교하였지만, 종전의 학교 교사와 선교사들이 학교를 떠나 주인 없는 학교가 되자, 동년 12월 4일 과거 교육경력을 가지고 있던 최동선(崔東善)이 청주제일교회로부터 인수하여 1936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의 가교사에서 운영되다가 1941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 오늘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 후 일제는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청남학교(淸南學校)를 합병하여 성남국민학교(成南國民學校)로 개명하고 공립학교로 운영되었는데, 8.15해방을 맞은 후, 1945년 9월 24일에 청남이라는 옛 이름을 되찾아 청남국민학교가 되었다가 오늘의 청남초등학교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청남학교는 일제로 인한 수난 가운데에서, 기독교정신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교육내용과 방법을 택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면서 많은 종교, 사회적 지도자들을 배출 시켰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교회, 선교사, 시민들의 후원과 협조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 학생을 가르치는 젊은 애국청년들과 우국지사들이 청남학교 교사로 부임하였고, 특히 학감으로서 실제상의 교육의 책임을 맡고 있던 김태희와 최창남은 청남학교의 민족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3) 망선루(望仙樓) 복원(復元)
망선루는 고려조때 세워진 누각으로 관아의 건물로 사용되던 중 1921년 일본 경찰서 내 무덕관(武德殿)신축으로 역사적인 망선루가 헐리게 되었다. 당시 청주 청년회 회장이고, 교회 장로인 김태희(金泰熙)는 우리 문화유산인 망선루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그냥 헐리어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격하고 이 건물을 옮겨 민족문화 유산을 잘 보존함과 동시에 유용하게 사용할 방안을 세웠다. 그 외 김종원(金鍾元)․김정현(金正賢)․이호재(李鎬宰)등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교회 청년들이 망선루를 보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대금은 유지들이 조달하고 이전 작업은 청년회가 책임을 지며, 망선루를 교회 내에 복원하여 학교 건물로서 활용할 것을 계획하였다.
▲ 망선루를 배경으로 청남학교 창립 30주년을 기념함 (1935. 3. 19)
그들은 이 민족문화의 유산을 보존하기 위하여 뜻이 있는 시내 청년들과 일반 유지들에게 모금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고적 보존을 명분으로 하여 충청북도경찰국으로부터 수의 계약으로 2천원에 망선루를 인수하였다. 일단 인수는 하였으나 이전 장소와 복원 건축비가 마련되지 않아 2년간이나 복원사업이 추진되지 못한 채, 자재들은 공터에 방치되고 말았다.
김태희 회장은 청년회원들과 함께 복원 문제에 대해서 청주읍교회와 본격적으로 협의에 나섰다. 그 내용은 방 한 칸은 청년회의 사무실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청남학교 교실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김태희 회장은 청남학교 교감이라는 직분을 맡고 있었고, 때마침 청남학교는 청신여학교를 합병하여 교실 부족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시기에 교회로부터 동의를 얻고, 장소를 물색하여 교회 내 청남학교 운동장 북편에 있는 복숭아밭에 망선루를 복원하여 그 건물을 학교 교실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 당시 벌였던 망선루 복원을 통한 민족문화 보존 운동은 청주의 민간단체가 처음으로 벌인 중요한 시민운동이었으며, 나라 잃은 민중이 벌인 자발적이고도 합법적인 애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4) 구국청년들이 모인 청주읍교회(淸州邑敎會)
청주읍교회가 정치․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젊은 층에게 새로운 가치와 활동의 공간을 제공하였으므로,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교회에 나왔고, 사회의 변화와 구국을 갈망하던 젊은 청년들도 열심히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교회 설립 1년 만에 교인이 50여명을 넘을 정도로 부흥하였다.
청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남문로 1가 154번지 일대의 이 지역은 본래 청주 영장(營將)의 관사와 죄인들을 가두는 옥사가 있었던 장소로 조선 후기 천주교 대 박해 때에 많은 교인들이 고문을 당하고 마침내 순교의 피눈물을 흘리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러므로 청주읍교회는 개신교회로서, 조선시대 천주교인들이 고문당하고 순교당한 바로 그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데에 또 다른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당시 동학운동(1894~1895)때 관군 편을 들어 공을 세운 보부상 조합이 그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그 땅을 사들인 것이다. 1천5백평 되는 넓은 대지를 확보한 교회는 1백석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방흥근의 집에서 모이던 청남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고, 여학교인 청신학교(淸信學校)도 설립하였다. 후에 소민병원(蘇民病院)으로 발전하는 시약소(施藥所)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당유치원과 청주남녀 성경학원도 이곳에서 설립되었다.
이곳 청주읍교회는 구국의 정열을 가진 애국청년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또한 이 교회출신들이 일제시기 민족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일제치하의 탄압 가운데에서 구국의식을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 그나마 모일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청주읍교회는 전도․교육․사회운동, 그리고 민족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청주읍교회(淸州邑敎會)는 1909년 평양 남문 밖 교회에서 이사 온 장로 박정찬(朴禎燦)을 장로로 위임하여 당회를 조직하므로 충북 최초의 자립교회가 되었다. 당시 당회장은 민노아 선교사였다. 같은 해 청주기독청년회가 조직되었는데 초대 회장인 김태희(金泰熙)씨가 본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일으켰다.
청주읍교회는 1910년 박정찬(朴禎燦) 장로가 신학교를 졸업하자 민노아 선교사는 동사목사(同事牧師)로 청빙(請聘)하여 첫 한국인 목사로서 청주읍교회 제1대 목사가 되었다. 그 후 이원민(李元敏), 황준국(黃濬國), 최영택(崔榮澤), 함태영(咸台永) 등이 이어서 시무 하였고, 이동순(李東舜), 최영택(崔榮澤), 곽경한(郭京漢), 김정현(金正賢), 김종원(金鍾元), 김태희(金泰熙), 최원진(崔元珍), 이호재(李鎬宰), 서상필(徐相珌)등이 장로로 봉사하면서 교회가 크게 발전되었다.
이렇듯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치던 김태희 장로는 1933년 이후 청주를 떠나 신탄진으로 이주하여 야학을 개설, 청년운동을 전개하며 애국․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가 1936년 조국광복의 한을 품은 채 눈을 감았다.정부에서는 김태희 장로의 일제시대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하였다.
* 전순동『충북기독교 백년사』충북기독교선교100주년 기념사업회(2002), 전순동·최동준『기독교와 충북근대교육』동해출판사(2003)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