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
望仙樓 上樑文에 대한 一考
1) 서 언
청주를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 역사의 도시라고 할 때, 이 모두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은 망선루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청주 지역에 역사성이 있고 유서 깊은 문화재가 적지 않은데, 특히 망선루는 역사적인 고건축적 문화재로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특히 일제기 이후 청주 근대 교육의 산실이요 민족운동․사회문화운동의 보루로서 역할을 감당하여 온 이 지역의 유일한 역사적인 건물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청주시 남문로 1가 154번지 청주제일교회 구내에 위치하고, 지방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한 망선루가 이미 노후하여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운 한계상황에 이르게 되자, 관심 있는 시민․민간단체 및 교회는 시민운동차원에서 그리고 교회차원에서 이건 복원운동을 관계 당국인 충청북도와 청주시에 열렬히 지속적으로 건의․호소하여 왔다. 문화재를 담당하고 있는 청주시에서는 마침내 문화재 관리위원회의 자문을 얻어 이건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마침내 1999년 10월 말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이 건물 해체과정에서 망선루 대들보로부터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평소 망선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필자는 이 상량문이 발견된 경위, 상량문의 해석, 거기에 관련된 인물 소개, 그리고 상량문이 가지는 의미 등을 살펴봄으로써 망선루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밝혀 보고자 한다.
▲ 청남학교 교사 망선루 청주 제일교회 구내 (1950년)
2) 망선루 약사
망선루를 소개하는 문헌 중 제일 오래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망선루는 고려 관아의 건물로, 청주 객관(客館)의 동쪽에 위치한 누각이었으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였다. 14세기 후반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공민왕은 난을 피하여 안동까지 내려갔다가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환경(還京)하는 도중에 청주에 수개월 머물러 정사를 돌보았는데 그 때 공민왕 10년(1361) 청주에서 문과(文科)와 감시(監試)를 치르고 합격자의 방(榜)을 이 취경루에 내 걸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이 누각이 노후된 상태로 헐어 있었던 것을 100년이 지난 세조 7년(1461)에 목사 이백상(牧使 李伯常)이 증수 하였으며 이때에 한명회(韓明澮)가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望仙樓)라 하였다. 그 후 이섬(李暹)이 증수하고 다시 목사(牧使) 이수득(李修得)이 보수한 바 있는 2층 누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누각은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문사(文士)들이 함께 모여 시문(詩文)을 읊고 시국과 정론을 논하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일제시기에는 청주 면사무소, 청주 여자공립보통학교 건물로 사용되어 오다가 청주경찰서 내 무덕전(武德殿)신축을 빌미로 1921년 누각 망선루가 헐리게 되었다. 이에 청주제일교회 장로요 청주청년회 회장으로 활약하던 민족운동가 김태희를 중심으로 일제기 민족문화 유산을 지키려는 청주청년회, 청남학교 교직원, 교회 청년 및 시민들이 합력 하여 청주제일교회 구내에 이건 복원하였다. 1923년부터 시작된 복원 건축은 마침내 1924년 1월에 이르러 상량식이 거행되었다.
이 망선루 복원운동은 일제시기 청주의 민간단체가 벌인 최초의 시민운동이고, 나라 잃은 민중이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민족 문화 보존 운동이었으며 자발적이고 합법적인 애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실로 지대하다고 하겠다.
망선루는 길이 64자, 폭 28자,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에 약 50여 평 면적을 차지한 2층 건물로 이건 복원되었다. 본래 1층과 2층이 툭 트인 누각이었지만 당시 이 건물을 옮겨 복원하는 목적중의 하나가 육영의 장소로 활용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1, 2층의 툭 트인 사면 공간을 벽돌로 막고 창문을 내었으며 안에도 칸을 막아 교실을 만들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양쪽으로 내었다. 외부 형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살렸지만 내부 구조는 실제 교육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개조하여 배치하였다.
복원된 망선루는 그 이후 주로 청남학교 건물로 사용(1924~1938)되었으며 그 외에 청주성경학원, 상당유치원, 야학 등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한글 강습회 등 각종 집회와 강연 장소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세광중학교, 세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YMCA회관, YWCA회관, 해방 후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大韓獨立促成國民會 忠北支部), 청주삼각소년단{(淸州三角少年團)대한보이스카웃의 전신}등 여러 단체와 기관이 이 곳을 활용하였으니, 망선루는 근대교육의 산실이요, 일제기 민족문화의 보루로서, 충북 교육문화의 요람지가 되었던 것이다.
충청북도에서는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1982년 12월 17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로 지정하여 보호하여 왔다.
이러한 망선루가 세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외면당하고 있었다. 이 건물이 위치한 곳은 과거 청주 남문(청남문)에서 약 300여m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위치도 좋았고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육거리 시장 통에 연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궁벽하여 시민들이 발걸음을 쉽게 옮기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거기에 더욱 이 건물이 교회 구내에 있는 관계로, 일반사람들은 그것이 문화재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저 교회건물이려니 생각하기가 일수였으며, 이로 인하여 결국 이 건물은 시민의 사랑으로부터 사각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0여 년 전부터 망선루 이건 복원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이 건물이 노후하여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동안 망선루를 관리하여 오던 청주제일교회에서는 여러 차래 망선루의 복원을 당국에 호소하여 왔다. 교회 신축을 계획하는데 망선루 때문에 공간 배치가 장애가 된다는 면도 있겠지만, 애착을 가지고 아껴오던 귀중한 문화재가 노후하여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렵다는 상황 판단에서였다.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서 교회가 함부로 손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도나 시에서 수리와 보존을 위한 어떤 적극적인 대응책을 강구하지도 않고 있어,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는 한계상황까지 왔다고 인식하고 이건 복원을 당국에 호소한 것이다.
이 문제는 시민들에게까지 여론화되어갔다. 특히 청주지역사회에서 시민의 요구를 바탕으로 순수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청주시민회가 망선루 이건 복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 문제를 시민회의 본격적인 사업으로 정하고 청주시와 충청북도에 망선루 이건 복원을 줄기차게 요청하였다. 망선루 이건 복원에 관련된 설문조사, 망선루 보존을 위한 촉구 성명발표, 충북시민회 신문인 “충북시민”을 통한 홍보, 시민의 의견을 모으는 공청회 등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하였다. 1995년 7월 10일에는 청주시민회 주최로 청주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망선루 이전 복원을 위한 시민공청회를 개최하여 여론화하였고 199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6월 23일에 유네스코 충청북도 협의회 주최로 “내 고장 문화유산의 현황과 과제” 라는 주제 하에 시민을 대상으로 한 문화유산 기념세미나를 개최하여 망선루의 이건 복원 문제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시민들과 학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어 이에 대한 연구와 글들이 이어 발표되었다.
3) 망선루 해체와 상량문 발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망선루가 이미 노후하여 한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망선루 복원 이건 에 대한 시민운동이 전개되고 청주제일교회에도 건물 이전과 복원을 강하게 요구하여 왔다.
청주시에서는 복원을 계획하고 망선루 이전 복원과 관련된 설문조사를 실시한 후 충청북도 문화재 위원회에 이전 복원에 대한 연구검토를 의뢰하였다. 복원 문제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하였다. 원래의 위치인 북문로 1가 170-1번지의 구 경찰서 자리로 이전하여 복원하는 안, 청주제일교회 구내의 현재 그 자리에 복원하는 안, 중앙공원에 복원하는 안, 제3의 장소에 문화재단지를 조성하여 그 곳에 복원하는 안 등 여러 견해가 대두하였다. 원래의 위치로 이건 복원됨이 가장 합당하고 최선의 일이나 그 곳은 이미 사유지가 되어 있어 그 땅을 매입하는 데만도 엄청난 금액이 소요되는 일임으로 현실성이 희박하고, 제3의 장소를 찾아 문화단지를 만든다는 것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현재의 자리는 위치가 궁벽할 뿐만이 아니라 주택 밀집지대로 통풍에도 문제가 있고, 거기에 더욱 교회의 이전 요구도 있어 다른 곳에 옮겨 복원하는 것이 좋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소를 옮긴다고 한다면 현재의 위치에서나 본래의 위치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청주 동헌(東軒)이나 충청도 병마절도사 영문(營門)등의 문화재와도 가까이 있어 연결지을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인 중앙공원이 최선의 장소라는 쪽으로 여론이 집약되어, 당국에서는 이건 장소를 중앙고원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전 복원 장소를 중앙공원으로 예정한 청주시 문화재 담당 부서는 해체 및 복원 작업을 추진하였다. 해체와 복원 작업은 문화재 건축의 경험과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장현석 건축사무소가 담당하였다.
마침내 1999년10월말부터 11월초 약3주간에 걸쳐 해체작업이 실시되었고 그 가운데 11월 9일 망선루 대량(大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었다.
▲ 망선루 상량문 보관통 (1924. 1. 28)
상량문은 상량(대들보)에 가로 60cm, 세로 6cm 크기로 파여진 홈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 홈 안에 그냥 그대로 상량문을 넣은 것이 아니라 금속제로 된 원통형 캡술(길이55cm 직경4.2cm의 원통형함석)속에 상량문을 넣어 밀봉하여 홈 안에 넣었다 그 위에는 “상량문재중(上樑文在中)”이라 쓴 판자 (60cm x 6cm x 2cm)로 뚜껑을 하여 덮었다. 그 홈 안에서 “상평통보” 엽전 1닢도 발견되었다.
그 원통형 캡술 속에서 망선루의 이건 원인과 약사문(略史文) 1매, 청주청년회 집행위원 및 청남학교 직원 명단 1매, 상량문(上樑文) 2매 등 모두 4매의 귀중한 문서가 나왔던 것이다.
4) 상량문 해석
원통형 캡슐 속에서 나온 "망선루의 이건 원인과 약사문"과 "상량문"은 현대인이 보기 어려운 한문 투의 문장으로 되어있어, 그것을 여기에 번역하여 옮겨보려 한다.
상량문이란 건물을 지은 후 길상(吉祥)을 기원하는 일종의 축원문이다. 이 상량문은 이름 그대로 망선루(望仙樓), 곧 선인(仙人)을 대망(大望)하는 누각(樓閣)의 상량문이어서 그런지 주로 신선사상에 관한 문구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 1156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박용호가 글을 짓고 윤홍식이 해서 채로 기록하였는데, 그 구성은 신선에 대한 찬양, 망선루를 건립하게 된 이유, 망선루의 위치, 망선루의 주인, 망선루가 있는 청주지역의 빼어남과 문화전통, 망선루의 내력, 망선루 건축의 정교성, 망선루의 위풍과 아름다움, 망선루 건축 후의 태평성대 기원 등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에 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문체는 축원문이므로 고전적 경어 체를 사용하였다.
▲ 망선루 상량문 (1924. 1. 28)
- 망선루 상량문 해석 -
엎드려 생각건대,성관(星冠)쓰고 월패(月牌)를 찬 도사가 현포(玄圃)에 강림하는데, 이곳에 어찌 금전요대(金殿瑤臺)가 없단 말인고. 예상(霓裳)을 입고 하개(霞盖)를 쓴 신선이 청구(靑邱)에 노닐려는데 어찌 주궁패궐(珠宮貝闕)이 없단 말인고. 한가한 날에 유상지소(遊賞之所)를 갖추어 놓으려, 이름 있는 큰 고을의 공지(空地)중에서 아름다운 곳을 자리로 잡았노라.
대저 생각하건대 이곳의 주인은 결코 구학(邱壑)에 묻혀 지낼 천한 몸이 아니요 참으로 속세를 초월한 깨끗한 인물이로다.
이름은 요적(瑤籍)에 등재되어 학(鶴)을 타고 삼도(三島)를 노니는데, 좌로는 부구공(浮邱公)을, 우로는 홍애(洪厓)를 거느리도다. 관직은 경반(瓊班)에 철해져 있어 용을 타고 구구(九衢)를 다니는데 아침에는 봉래산, 저녁에는 방장산이로다.
무궁지문(無窮之門)과 광막지야(廣漠之野)를 소요하노니 옥수기화(玉樹琪花)로다. 담박(澹泊)을 집으로 삼고 청진(淸眞)을 고향삼아 차분히 거하노니 산수가 아름다운 연하천석(煙霞泉石)이로다.
그리고 우리 낭성(琅城)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남쪽으로는 호남과 영남 백주(百洲)의 땅을 끌어 제압하고 북으로는 청천과 진천의 만 구비 꺾여 흐르는 냇물을 잡아끌어 누르고 있도다. 주변 멀리 아름답고 푸른 경치가 길게 펼쳐 있으며 마을의 밥 짓는 연기와 상마(桑麻)가 서로 마주 보이는 평화로운 곳이로다. 높고 높은 상당(上黨)이 가로질러 있어 사람들은 전쟁을 알지 못 하도다.
서해의 해염(海鹽)은 눈처럼 많이 쌓여 있고 동해의 해태(海苔)는 구름처럼 풍요하니 참으로 하늘이 내려준 물화의 보고로다. 아침 저자에 사람들이 비 오듯이 몰려들고 저녁시장에 사람들이 싸락눈처럼 흩어져 나가니 과연 백성들이 많이 모여 사는 신령한 땅이로다.
이에 높고 포송포송하게 잘 마르고 시원하게 확 트인 밝은 언덕에 영롱 찬란하고 높고 훤칠한 누각을 짓기로 하였도다.
장성(匠星)을 처마 끝에 달아놓고 목수가 재목을 가리고 철산(鐵山)이 난간 사이에 누르고 있으니 금정이 빛을 내도다. 바람을 도끼 삼고 달을 자귀 삼아 누각을 짓는데 기묘하고 정밀함은 옛날 반수(般倕)의 교장(巧匠)에서 빌리고 끌로 휘둘러 파고 풍로로 녹여 만드는 기술과 노련함은 옛 추범(錘範)에서 얻었도다.
육오(六鰲)는 봉래산, 영주산을 등에 지고 붉은 안개 내뿜으며 머리를 위로 쳐들고 있고, 쌍 무지개는 오성과 이십팔수의 은하를 마시며 푸른 안개 속에 꼬리를 드리웠도다.
오호라 신축한 누각의 기반 견고하기가 총생한 대나무 같고, 치밀함이 무성한 소나무와 같은데, 바야흐로 닭 울음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도다. 창공에 학이 나르고 봉이 비상하는데 위로 높이 날아 천척(千尺)이나 되는 철당간에 이르고 용과 호랑이는 푸른 벽 아래 웅크리고 앉아 있는데 아래로 백간(百間)이나 되는 남석교(南石橋)로 통하도다. 푸르스름한 아지랑이 낀 산봉우리며 구름 피어오르는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겹겹이 에워싸여 있어, 마치 담밖에 상투 틀려 있는 것 같고, 천촌만락(千村萬落)의 많은 촌락이 바둑판 위의 돌 같아 그 역력함이 거울 속에 얼굴 보듯 하구나. 뉘엿뉘엿 석양 질 때면 우암산 목동의 피리소리 들려오고 부슬부슬 내리는 가는 비는 금천의 고기잡이 등불 전송하도다.처음에는 이 누각에 취경루(聚景樓)라 편액을 달았는데 중간에 다시 망선루(望仙樓)라 고쳐 걸었도다.
고려 공민왕의 어차(御車)가 잠시 머물렀다는 소식 전해진지 오래이나 지정기(至正期)의 옛 고적 아직도 그대로 있도다. 이재상(李宰相)이 수선한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천순(天順) 시기의 아름다운 이름 없어지지 않았네.
옥으로 장식한 서까래 끝에 햇빛 비치니 옥섬돌에 기러기처럼 가지런히 줄지어 있고, 아름다운 비단 무늬 놓은 곳에 별 빛이 흐르니 물고기가 기와에 비늘을 엮어 놓은 것처럼 아름답도다. 비취색의 발과 황금의 벽에는 상서로운 안개가 밤마다 드리우고 부용(芙蓉)의 휘장과 백은(白銀)의 상에는 길상의 무지개가 날마다 걸쳐 있으니 이것 어찌 사람의 힘으로 꾸밀 수 있으랴 바로 하늘의 조화로 된 것이로다.
아득히 멀리 단군, 기자 수 천년 팔도에 걸쳐 백성을 다스려 번영과 왕성함을 이루었고 멀리 신라와 고구려가 1백 세대를 지나며 삼한 땅의 풍우(風雨)를 다 일일이 겪었도다.
아름다운 옥경(玉磬)을 치는데 동쌍성(董雙成)의 생황(笙篁)처럼 하늘의 아름다운 곡에 어울리고 옥소(玉簫)를 타며 즐기는데 왕자진(王子晋)의 학처럼 하늘의 신비한 영음(靈音)을 섞어 놓았도다. 대저 건물이 이 어찌 높고 밝은지 귀신이 반드시 넘볼 것이요 물건이 어찌 풍성한지 조화옹(造化翁)이 또한 필경 시기하리라.
마고(麻姑) 선녀의 손이 몇 번이나 거쳐 갔기에 항하(恒河)의 그 아름답던 얼굴이 벌써 거칠어지고 주름졌단 말인가.
천황지노(天荒地老)는 거꾸로 매단 병의 물 쏟아짐 같아 돌이키기 어렵고 운번우복(雲飜雨覆)의 세월 비탈진 언덕 판을 내려 달리는 둥근 구슬과 같으니 막을 길이 없도다.
남산 북산이 기둥처럼 깎이고 언덕 변하여 골짜기가 되고 골짜기 변하여 언덕이 되었네. 장정(長亭)이나 단정(短亭)의 구심(鉤心)이 다 펴져서 마치 숫돌처럼 평평하고 반질반질하게 되었고 화살처럼 곧게 되었도다.그런 까닭에 백척(百尺) 누각이 하루아침에 빈터가 되고 말았도다. 우부(愚婦) 필부(匹夫)는 차탄(嗟歎)하며 오직 무시공자(無是公子)에 그 탓을 돌리고 있을 뿐이고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손가락으로 지적하며 조유선생(鳥有先生)의 탓으로 돌리도다.
부왕태래(否往泰來)의 순환의 천리가 저기에 있고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성쇠(盛衰)의 물리 여기에 있도다.
다행스럽게도 여기 청년들은 맹해(孟解)처럼 호협(豪俠)한 기풍을 지닌 자이고 연나라와 조나라의 비분강개한 선비에 견줄만한 우국지사들이외다. 예전의 설계에 따라 옮겨 짓되 이미 넓고 좋은 터의 길흉을 점쳐 보았고 새로 짓는 공사를 알리고 수축함에 있어 남원과 북원의 빈부를 따지지 않았도다. 여력을 남기지 않고 서까래를 바꾸고 문설주를 갈면서 모두 깨끗하게 소제하고 모두 이전의 규모와 형세를 따라 곡절을 살펴 방우(方隅)를 승척(繩尺)에 맞게 하였노라. 청산(靑山)의 모습 바꾸니 섬돌과 정원의 묵은 때 모조리 다 치워졌으며 녹수(綠水)도 광채를 더하니 창문도 새로 말끔하게 되었도다.
이 망선루는 무릇 2천년을 지켜오다 중간에 헐렸고 이건(移建) 공사는 4·5개월 걸려서야 비로소 완성 되었도다. 온갖 재앙 죄다 없애며 남은 연기마저 몽땅 흩날려 버리고 상서스러운 일만 반드시 찾아와 봄날의 햇살처럼 집에 가득하게 하소서.
쌍사(雙鷥)를 그린 경갑(鏡匣)은 범상을 초월하여 옥녀(玉女)가 내려와 자리하고, 채봉(彩鳳)을 그린 향대(香臺)는 세속을 떠나 있어 선옹(仙翁)이 찾아와 난간에 기대리로다. 길일(吉日)을 택하여 낙성하니 축하하러 모인 사람 오늘 저녁부터 영원하리라.
쟁반에는 산해진미를 다 갖추었는데 벽우(碧蕅)와 반도(蟠桃)도 있고 바람은 아홉 등불을 흔드니 임연옥사(琳筵玉榭)로다.
자기(紫氣) 그득 에워 싸 노자를 함곡관(函谷關)에서 만나고, 청조(靑鳥)가 사뿐사뿐 날아오니 서왕모(西王母)를 요해(瑤海)에서 맞이하도다. 사학(鷥鶴)이 날아 모여드니 영롱한 처마가 노을 빛 휘장에 나직하고 연작(燕雀)이 축하하며 날아 들어오니 옥돌로 장식한 집에 비단무늬 장막을 드리웠도다.
꽃 같고 초승달 같은 곡미(曲眉)를 지닌 풍협(豊頰)의 미인(美人)이 긴 옷자락을 끌면서 명금(鳴琴)을 뜯고 주옥(珠玉)같은 문장을 지닌 학사(學士)가 붉은 종이를 펼치고 그 위에 붓을 뽑아 들도다.
장대미려(壯大美麗)한 건물을 옮겨 짓는데 도우려는 것이외다.
어여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멀리 부상(扶桑)바다 위로 붉은 해 떠 오르도다. 명악(名岳)에서 노니는 신선이 보일 듯하고 너풀너풀 생황소리에 학이 구름 속에서 내려오도다.
어여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절목진(折木津) 가에 지는 해가 나직하다. 은하수는 멀리 일천 개의 산골 물 사이로 떨어지고 은하의 맑은 모래는 눈같이 흰데 저녁연기에 새들이 지저귀도다.
어여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멀리 산봉우리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고 물은 못에 가득 하도다. 우거진 수풀너머로 은은히 인가 비치고 매일 아침저녁 밥 짓는 연기 자욱하도다.
어여차 들보를 북쪽으로 들어 올리니 내와 들은 아득하여 끝이 없고 물이 굽이굽이 돌고 산이 구불구불 에워싸기 몇몇 겹이며 만호(萬戶)에 복사꽃 활짝 피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네.
어여차 들보를 위로 들어 올리니 새벽 동녘의 빛이 운금장(雲錦帳)에 밝게 비치고, 걸쳐 있는 무지개 다리, 보기에 더욱 좋고, 봉새 날개 펴 하늘을 치니 그 기세 호탕하구나.
어여차 들보를 아래로 내리니 봉가(鳳駕) 타고 아래로 팔해(八垓)를 굽어보네. 곳곳의 여염(閭閻) 집 다투어 격양가 부르고 영롱(玲瓏)하게 장식한 만 가닥의 실타래는 붉은 서기(瑞氣)를 뿜어내도다.
엎디어 바라건대 상량을 한 후에는 좋은 나무에 늘 따사로운 봄 깃들고 아름다운 풀이 시들지 않게 하소서.
한 세상 수성(壽城)에 올라 시화년풍(時和年豊)하게 하소서.
만민을 강구(康衢)에서 살게 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하소서.진시황제 한 무제처럼 층성고각(層城高閣)에서 오래도록 세월 보내며 사는 그런 행적과는 달리 그저 바라기는 안기생(安期生)이나 옥전(屋佺) 신선 같이 아름다운 창과 옥으로 장식한 대자리에서 세상의 오욕과 근심걱정 끊고 편안히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옵니다.
정신은 가장 높은 하늘 달밤의 이슬에 놀게 하고 손으로는 삼초(三肖)의 성진(星辰)을 어루만지게 하소서.
단군기원 사천이백오십칠년 갑자(甲子) 일월 이십팔일
구주강생 일천구백이십사년 일월 이십팔일
영해(寧海) 박용호(朴龍鎬)가 짓고
파평(玻平) 윤홍식(尹弘植)이 쓰다
5) 망선루의 이건 원인과 약사 해석
생각하건대 우리 청주는 삼한 고군(三韓古郡)이고 삼남 웅주(三南雄州)이다. 인물의 번영과 산천의 수려함은 호남 영남의 관문이요 명승이 빼어난 곳이다. 청주(淸州) 부내(府內)에 3대 고적이 있으니 하나는 남석교(南石橋)요 또 하나는 망선루(望仙樓)요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철당간(鐵幢竿)이니 남석교는 신라시조 박혁거세 원년 갑자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망선루의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니 남석교(南石橋)와 동년대(同年代)에 영건(營建)된 것이며 철당간(鐵幢竿)은 고려 광종 준풍(峻豊)3년 임술년(壬戌年)에 처음 세워진 것이다. 이 3대 건축물의 굉걸(宏傑)하고 웅대(雄大)함은 조선(祖先)의 예술을 명백히 증명하는 것이며 수리하여 본 모습대로 계승하는 것은 고인(古人)의 뜻을 잘 기억하고 간직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오호라 이 누각이 삼십삼 갑자의 장구한 세월을 보존하여 지켜 오다가 불행하게도 임술년(壬戌年) 8월경에 시 구역 개정으로 인하여 헐리어 걷어치워지게 되니 우리 후인(後人)들은 탄식의 긴 한숨이 절로 나고 한 움큼의 피눈물이 왈칵 흘러나옴을 금할 수 없다. 이것을 개탄한 청주 청년회와 사립 청남학교에서는 힘을 합쳐 이건하게 되었는데 옮겨 지음에 원형을 그대로 살리는 것은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려는 것을 중심으로 하여 선조들이 남긴 유물을 영원히 존속하게 하며 육영(育英)의 장소를 만들어 후손의 창달을 장구히 꾀하려는 것이다.
청주읍지에 의거하면 이 건물은 객관 동쪽에 있었으며 옛 이름은 취경루다. 지정(至正) 신축년(辛丑年)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부터 이곳에 이주하여 수개월 머물렀다. 홍건적이 평정되자 이곳에서 문과(文科) 및 감시(監試)를 실시한다는 방문(榜文)을 전국에 발하였는데 청주에서는 후인들이 그 방문을 이곳에 내 걸었다. 오랫동안 누차 훼손되어 오던 것을 천순(天順) 신사년(辛巳年)에 지방관 목사 이백상(牧使 李伯常)이 중건하고 한명회(韓明澮)가 다시 편액을 고쳐 망선루(望仙樓)라 하였다고 운운하고 있다.
조선 현종 8년 정미년 4월1일에 목사(牧使) 이섬(李暹)이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단군기원 사천이백오십칠년 갑자(甲子) 일월 이십팔일
구주강생 일천구백이십사년 일월 이십팔일
월성 후인 김태희(金泰熙) 적고
파평 후인 윤홍식(尹弘植) 쓰다
▲ 망선루 이건 원인과 약사 (1924. 1. 28)
▲ 청주청년회 집행위원과 청남학교 직원 명단 (1924. 1. 28)
이상 망선루의 약사문을 소개 하였는데, 마침 1924년 당시 12살의 어린 소년으로서 상량식에 참가하여 그 광경을 목격하고 지금은 90세가 넘은 연세이지만 아직도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증언한 이창수(李昌秀) 장로가 당시를 회상하며 적은 글이 있어 여기에 소개해본다.
상량하는 날은 퍽 포근한 날씨였다. 2층 중앙에서 동쪽으로 한칸 당겨서 대들보 밑 마루에다 의물(儀物)이 없이 나무토막(일명 마룻대)에 상량연대가 씌어진 것이 놓여 있고, 옆에 빈 상이 있었다. 김태희 정규택 이명구 김철환 선생 등 약 50여명의 유지가 빽빽이 모였고 마룻대에 집어넣을 상량문을 차례로 읽고 접어서 나무토막에 넣고 꼭 맞는 나무쪽으로 덮어 막고 양쪽에다 무명베로 동여 메어 양쪽에서 달아 올리도록 묶어서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잡아당기게 하여 놓고 도목수가 빈 쟁반에 상량 값을 내놓으라고 한다.
앞에 서 있던 주모격(主謀格) 유지 3~4인이 지전을 내놓았다. 마룻대를 약간 올리더니 무거워서 못 올라가니 또 놓으라고 한다. 청년들이 지전을 내 놓았다. 조금 올라가더니 또 멈춘다. 이러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마침내 올라갔다.
모두가 웃으며 소리를 지르고 또 큰 소리로 나무라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것들이 관습화되어 상여가 내를 건널 때나 비탈진 산 초입에 오를 때 어렵다는 핑계로 올라가지 않고 머물러서 돈을 뜯어낸다. 이런 식으로 마룻대를 올리는데 일부러 실랑이를 한참하고 돈을 뜯어낸 다음 들보위로 올리고 초꼬지 위에 얹어 마룻대를 쳐서 박아 놓는다. 상량목에 매였던 베(布)를 풀어서 내려뜨리니 도목수가 그 베를 차지한다. 사람들이 둘러 선 한 복판에다 빈 상을 놓고 안주 몇 접시와 건포(乾脯) 김치 등을 놓고 약주와 탁주를 반자기(半瓷器:물동이)에 가득 부어 놓고 흰 사발에 술을 따라 몇몇 유지가 마시고, 한쪽에서도 목수와 인부들이 탁주를 마신다. 청년 몇몇도 술을 마신다.
이상이 소년이 목견(目見)한 상량식의 전부다.
* 全淳東,「望仙樓 上樑文에 대한 一考」『中原文論叢(충북대) 제4집(2000)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