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애국지사 일석 김태희선생과 청주의 근대교육

 
시인 도종환

시인 도종환

오늘은 김태희 선생이 돌아가신지 70주기가 되는 날이다.  기일에 맞추어 『애국지사 일석 김태희』출판기념회가 열린다고 한다.  김태희 선생은 우리 지역에 근대교육의 문을 연 선구자이시다.  선생은 1904년 방원근, 김원배 등 우국 청년들과 함께 광남학교를 설립하셨다.  청주 지역 최초의 공립학교인 청주보통학교가 개교하기 3년 전의 일이다.  처음 설립 당시는 15명의 학생으로 출발하였고 운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1908년 정식 사립학교 허가를 얻어 학교명을 청남학교로 바꾸었다.

김태희 선생은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이셨다.  이 학교는 교과목이나 교육내용에 있어 근대교육을 지향하였으며 국권회복을 위한 양식 있는 한국인 양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교육을 많이 하였다.

이 학교를 다닌 이창수 옹은“청남학교 3학년에 들어오니 학생들이 애국을 말하고, 독립운동을 말하고, 상해임시정부를 말하여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뿐이다.... 합병된 후의독립운동, 각처의 의병 봉기, 만주벌판의 군관학교, 그리고 고종황제의 헤이그 밀사사건 등 9세에서 13세까지의 어린 나의 뇌리에 애국 사상이 박혔으니 일생동안 이것들을 뇌에서 지울 수 있을 것인갚하고 술회하고 있다.

1936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학교가 휴교되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지만 이 학교에는 김태희 선생의 뒤를 이어 학교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최창남 선생을 비롯하여, 나중에 의열단 결성에 앞장섰던 곽재기 선생, 구 한국군 장교출신의 신공균 선생,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된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 출신의 정순경 선생, 같이 투옥되었던 정규태 선생,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신창균 선생 등 민족의식이 강한 선생들이 많았다.

김태희 선생은 1921년 일제가 경찰서 내에 일본인의 검도와 유도 연마를 위한 무덕전을 짓겠다는 구실로 고려 때부터 있어온 망선루를 헐자 고적보전을 명분으로 2천원에 인수하고 3년 뒤 지금의 제일 교회 내에 복원하여 청남학교와 청신여학교 건물로 사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태희 선생이 벌였던 망선루 복원을 위한 모금운동과 민족문화보전운동은 일제 때 청주지역 민간단체가 벌인 최초의 시민운동이고 애국운동이었다.

이 건물은 청주성경학원, 상당유치원, 야학의 교사로 사용되었고, 강연회, 한글강습회 등 각종 행사와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에는 세광 중고등학교, 청신고등공민학교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YMCA회관, YWCA회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충북지부, 보이스카웃 등 여러 단체가 이곳을 거쳐 성장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학교와 단체와 교회를 통해 길러진 인재는 참으로 많았다.

김태희 선생은 1909년 신백우 선생 등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 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창립하였고, 상해임시정부 충북 독판부 참사로 임명되었으며, 1927년 신간회 청주지부 활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1936년 해방을 보지 못한 채 돌아가시어 청원군 미원면 운암리, 보은으로 가는 길가 얕은 산비탈에 누워계신다.  선생과 같은 분의 선구적인 교육구국운동, 독립운동의 힘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혜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우리는 김태희 선생과 같은 분들의 이름을 잊고 산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청주가 교육도시라 불리는 것임을 생각하면 교육도시란 이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현실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우리 지역의 시민들, 그중에서도 교사와 학생들이나 새로 교단에 서는 신규교사들에게 이런 분들의 생애에 대해 연수하고 교육해서 그 정신을 이어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출처: <중부매일> 도종환칼럼,  2006년 06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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