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7. 자랑스러운 할아버지

망선루 보존의 최대 공로자였던 김태희 선생(1936년 작고)은 누구인가?  역사는 그를 한마디로 “애국지사”라고 적고 있다.  1904년 노일전쟁의 격동기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방흥근, 김원배 등의 동지들과 함께 사립 광남학교(후에 청주 청남학교로 개칭)를 세우고 융희 년간에는 청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일찍이 여성교육에 힘썼던 그는 일찍부터 기독교에 귀의하고 신학문에 눈뜬 선각자였다.

1877년 청주시 탑동 195번지에서 출생한 김태희 선생의 호는 일석(一石), 교육 사업뿐 아니라 항일구국운동에도 눈부신 활약을 했던 일석은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대인 대동청년당에 가입하여 신백우, 신팔균, 곽재기, 민강 등 우리 고장 출신들과 손잡고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기미독립운동 때에는 선두에 선 인물이었다.  1935년 청남학교 개교 30주년에 이사회는 일석을 공로자로 표창했으며, 작고한 뒤인 1963년 3월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김태희 선생의 친손자인 김용구씨(38)에게 듣는다.

- 할아버지가 망선루 보존의 최대 공로자였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는가.

“어려서 할머니한테 들었다.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들은 것은 아니고 몇 가지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할머님 말씀에 의하면 망선루를 일본인들이 뜯어 없애려고 하는 것을 할아버지가 8원(『청주근세 60년사화』에는 8백1원이라고 나와 있다)을 주고 인수해 헐린 자재를 보관해 오다가 지금의 청주제일교회 안에 재건했다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당시 망선루를 제일교회로 ‘이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건이지 어떻게 이전이냐.”

- 할아버지가 보관해 오던 망선루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가.

“아버지가 관리해 왔다. 국가유공자 유족에게 주는 연금도 아버지가 받아왔다. 지금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정리를 못한 상태다.  망선루를 돈 주고 인수했다는 자료도 있을 것이다.”

- 독립운동 자금도 대주고 학교도 세우는 등 많은 활동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당시 어디서 재원을 충당했는가.

“청주에서는 요즘의 지물포 같은 것을 운영했고 말년에 신탄진으로 이주해서는 양봉과 특용작물을 재배해 돈을 벌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땅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 알아보니 시효가 지나 현행법으로는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충북대 부근의 4천여 평, 내덕동, 중앙공원부근 등지에 땅이 있다.”  

매우 어려운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할아버지 산소도 남의 도움으로 찾아 미원면 운암리에 이장하는 등 할아버지의 업적을 제대로 받들고 기록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그는 끝으로 이런 말을 했다. “할아버지에 관한 업적도 조건상 전 충북대 학장한테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손노릇을 제대로 못해 창피하다. 그러나 할아버지만큼은 자랑스럽다.”

*『충청리뷰』 1995. 8월호. p. 23 (一石 2代孫 金容九와의 대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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