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애국지사 일생 칠순 손자가 복원/ 4. 후손들 교직·자원봉사 통해 선대 유훈 실천

3. 애국지사 일생 칠순 손자가 복원

김현구씨 내년 자료집 발간 준비

“망선루 수호”  김태희선생 행적 

전국 돌며 30여 년 간 자료 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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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헌신한 할아버지의 활동을 정리한 자료집을 칠순의 손자기 직접 만들고 있어 화재다.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책략을 자발적인 민족운동을 통해 막으려했던 일석 김태희(1877~1936년․,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의 손자인 김현구(71․사진․부산 수영구 광안동)씨는 내년 김태희선생 서거 70주년을 맞아 자료집을 발간하기 위해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준비에 분주하다.

김씨가 이 작업에 뛰어든 것은 30년 전인 1975년이다.

“독립운동가의 행적이 너무 쉽게 잊히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복원하는 것은 후손이 해야 할 책무로 다가왔습니다.” 라며 강한 사명감을 지닌 김씨는 부산대, 부경대, 충북대, 청주대, 청주중앙도서관 및 부산시립도서관, 청주시청, 정부문서기록보관소 등을 방문, 할아버지와 관련된 당시 국내외 신문, 조선총독부 기록 등을 샅샅이 살폈다.

“1904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망선루”기사를 찾았을 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김씨는 “1921년에 일제가 고려시대 관아 건물이며 조선시대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던 장소인 망선루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무덕전(武德殿)을 세우려하자 할아버지께서 전면에 나서 문화재 수호운동과 함께 교육에 헌신하셨다”고 말했다.

김태희 선생은 일제가 1909년 사립학교 폐쇄령이 내리자 1904년에 설립한 충북지역 최초의 사립학교인 청주 광남학교(청주청남초등학교 전신)와 1907년 설립한 청신여학교 운영권을 미국 선교사에게 넘겨주고 교감으로 활동하며 교육 일선에서 독립운동의 끈을 이어갔다.  또한 1909년 대동청년당에 창단에 참여하면서 다방면으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이와 같은 김태희선생의 교육과 문화재 사랑은 손자인 김씨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6.25참전유공자회 부산광역시지부 총무부장인 김씨, 평일에는 참전유공자회에서, 주말에는 부산박물관 문화재 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한다.

김씨는 내년에 발간할 편찬 자료집의 모든 비용 400여 만 원도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충당한다.

*『국제신문』 2005. 8. 13. 송수진 기자의 글


4. "평생 자부심 하나로 버텼지"
후손들 교직·자원봉사 통해 선대 유훈 실천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대부분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라는 품위를 훼손하지 않으려고 애써 왔다. 

또 이들 중 상대적으로 교육 기회를 가진 후손들은 교직이나 공직에 진출, 선대의 유훈을 실천했다. 

독립운동가 김태희 선생의 손자 김현구(70·부산 수영구 광안동)씨는 자원봉사가 주업이다.

토·일요일은 부산박물관에서 문화유산 전문해설사로 나서고 평일에는 6·25유공자회 총무업무를 맡으면서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의 권리 찾기에 앞장서고 있다. 

김씨는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을 실감한다"며 "하지만 살아오면서 독립운동가 후손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현재 조부의 업적을 책으로 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해방 이전 신문과 고서 등에서 고증자료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뛴 끝에 200쪽 분량의 자료집 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 중 그나마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교직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지사 양명수 선생의 장자인 양형석(77·부산 연제구 거제3동)씨는 부산대 출신으로 40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다가 부산 토현초등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양명수 선생은 3·1만세운동으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른 뒤 해방될 때까지 농촌 계몽과 소비조합운동을 펼쳐 건국포장을 받았다. 

양씨는 "해방될 때까지 일본 순사가 우리집 주위를 배회하고 다녔는데도 선친은 가족들이 행여 해를 입을까봐 전혀 말을 않았다"며 "해방후 선친의 뜻을 알게 된 뒤 항상 큰 가르침으로 마음 속에 새기며 교직에 몸담아왔다"고 밝혔다. 

독립지사 조이제 선생의 손자 조현태(77·부산 수영구 망미1동)씨도 부산남중 교장을 끝으로 교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조씨 역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평생 힘든 생활을 했지만 아버지도 공직자(전 진주부시장 조성래씨)로 평생을 보내는 등 독립운동가 가문의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 『국제신문』 2005. 8. 1. 송수진 기자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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