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愛國志士 金泰熙先生
문하생 소봉 이창수
(門下生 蘇峰 李 昌 秀)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선생(先生)의 업적 이외에 내가 보고 느낀 선생의 모습을 솔직히 쓰려고 한다.
선생은 청원군 가덕이 고향(故鄕)이시다.
선생은 소탈(疎脫)하셔서 중심과 외모(外貌)를 꾸미거나 격식(格式)을 갖춘다든지 헛된 말이나 농담이 별로 없으며 항상 근엄(謹嚴)한 편이다. 어느 누구이든 선생과 대면(對面)을 하는 사람들은 선생의 기풍(氣風)에 자세를 흩트릴 수 없고 옷깃을 여민다. 선생의 체격은 작으시나 강직(强直)한 성격이 전신에 흐르고 있고 또한 선생의 눈길이 강렬하여 마주치기가 어렵다. 용(龍)의 안광(眼光)이라고나 할까? 평범하게 바라보시지만 정시(正視)하기가 매우 어렵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선교사 4-5인과 자주 만나면서도 그저 동자(瞳子)가 노랗고 푸르다는 것으로만 느꼈는데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눈은 그렇지가 않고 독수리의 눈과 흡사(恰似)하게 매서웠다. 서양인의 눈에서 이 같은 안광(眼光)을 처음 느꼈다. 김태희 선생의 눈매도 이와 똑같은 눈매라고 생각된다.
시장 통에 있던 청년회관(靑年會館)이 본정(지금의 남문로 1가)으로 나와, 소민의원(蘇民醫院) 옆 박경학선생(朴敬學先生)의 포목점(布木店) 뒷집인 현대식 주택으로 간판을 걸고 이사를 와서 매일 청년들이 출입을 하고 있다. 어느 해 여름에 회관 앞을 지나려니 10여명의 회원들이 길가에 나와 앉아서 부채질을 하는데, 그 가운데서 선생님이 환한 얼굴에 웃음을 담뿍 담으시고 이야기를 하신다. 그 용모(容貌)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는 한편 “휴우” 하고 안도(安堵)의 숨을 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노상 근엄(謹嚴)한 태도로만 살 수는 없지" 하며 선생의 기품(氣品)에서 자애(慈愛)를 처음 느끼고 그 후로는 선생을 보는 관점(觀點)이 달라졌다.
그러하지만 위에서도 지적하였다시피 평소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드러나지 않으며 그 날이 그 날인 양 곤혹(困惑)이나 당황하는 기색을 좀처럼 드러내지 아니 한다.
나는 고향 문의(文義)에서 1년간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를 다닐 때 6년 이상 10년 차이의 학생들과 한 반 아래로 다녔다. 가덕 향정(香亭)의 신약호·신석호씨, 화당의 정택영 등과 1년을 다니면서 애국사상이니 독립운동이니 왜놈이니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청남학교 3학년에 들어오니 학생들이 애국을 말하고, 독립운동을 말하고, 상해임시정부를 말하여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뿐이다. 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촌놈이라는 듯이 대하는 것 같다. 기영(基榮)이와 나를 제하고는 4~5년서 10년 이상의 연배 학생들이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어른스러웠다. 주먹을 불끈 쥐고 책상을 치는 학생의 모습은 어른스럽고 커 보였다. 나도 그들을 따라 애국과 애족의 사상이 자랐고 매일 조회시간에 기도회를 가지며 성경을 읽었다. 신구약 성경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에서 고통 받는 것과 로마의 속국이 되어 고통 받는 장면이 많다. 사립 종교계 학교는 성경을 배우니까 자연 애국사상(愛國思想)과 독립사상(獨立思想)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쉽사리 깨닫게 되었다.
어린 가슴에도 애국사상(愛國思想)이 움터 가자 김태희 선생의 독립운동의 거사가 어떤 것인지 무척 알고 싶었다. 기영(基榮)군은 통 말을 하지 않는다. 소년기를 벗어날 무렵 우연히 이동현 선생에게서 들을 수가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의 밀사(密使)와 선이 닿아서 손을 잡고 군자금(軍資金) 조달(調達) 책임을 맡으시고 지방유지(地方有志)에게 비밀히 군자금 모금을 한 것이 발각이 되어 옥고(獄苦)를 치르고 나왔다는 것이다. 그 후 서울에 가서 활동하는 것을 왜경이 체포하여 청주로 내려 보냈다. 고초(苦楚)를 겪고 그 때부터 요시찰인(要視察人)이라는 명찰이 붙어 촌보(寸步)도 자유로이 행동을 못하도록 하여, 1리 이상의 출타 시에는 신고하도록 제재(制裁)를 받으며 꼼짝을 못하게 했다. 그러나 선생(先生)은 보부상인(褓負商人)과 일반상인을 규합(糾合)하고 개화된 유지 청년을 설득시켜,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하여도 나라가 있어야 한다고 계몽(啓蒙)을 하여 청주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임무를 맡으셨다. 또한 교육의 절실함을 아시고 유지(有志)인 방흥근 씨와 김원배 씨의 협조로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쓰셨다 한다. 선생의 거사(擧事)를 듣고 궁금증이 풀려 가슴이 시원한 듯하다.
이는 모두 기독교(基督敎)에 입문(入門)하시기 전 이야기다. 1904년에 미국 선교사 민노아 목사가 청주에 와서 전도를 시작하며 교회당을 세우자, 우국지사와 우국청년들이 왜경의 감시(監視)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회합장소(會合場所)로 여기고 대거 입신하여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선생과 방흥근, 김원배 선생도 입신한 것이다. 민노아 선교사가 1904년 청주에 정착하기 8년 전에 조치원에서 청주로 들어와 지방상황을 답사(踏査)하였는데, 그 당시에 선교부 문서에 학교가 있는 것으로 기록이 되었다고 하니, 과연 선생은 선각자(先覺者)라 여겨진다.
민노아 선교사는 본정 일정목(本町 一丁目) 불종대(火災時打鐘) 옆 안집에다 자리 잡고 예배를 보며 현 교회의 터를 매입하고 교회당(敎會堂)을 크게 지었다. 학교는 그 당시 재정난으로 경영이 어렵게 되자 민노아 선교사와 협의하여 선교부가 인수 경영하고 선생이 학교 학감으로 남게 되었다. 선교부는 교회부지 동쪽에다 약 70평 정도의 건물을 짓고 청남학교로 개칭하여 운영하여 나갔다. 교회당은 현 위치의 서편으로 약 10m 밖에다 크게 단층으로 현재 교회당의 출입구와 위치가 거의 동일하게 지어졌다.
선생의 차자인 기영(基榮) 군(君)은 나와 동년배로 같은 반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기영 군은 어린 티가 나지만 자존심(自尊心)이 강한 소년이다. 고향이 미원 가덕인데 농사를 짓지 않고 탑동에서 양봉(養蜂)을 하여 꿀을 따서 생활한다고 한다. 무척 호기심이 나서 몇 차례 탑동 집을 가 보았다. 문안으로 들어서니 마당이 넓고 동서로 길쭉하고 높은 뜰이 있다. 동편 장독대 옆으로 높은 지대가 있는데, 거기에 수십 통의 꿀벌 통이 놓여 있다. 봄이라 그런지 벌들이 쉴 사이 없이 요란하게 출입을 한다. 조금 가까이 가서 지켜보니 뒷다리에 녹두알만한 노란 뭉치를 달고 들어오는데 나가고 들어오는 모습이 그렇게 분주할 수가 없다. 뒷다리에 달고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꽃가루를 뭉쳐서 뒷다리에 달고 들어오는데 저것이 벌들의 식량이라고 하며 너무 가까이 가면 쏘인다고 잡아당긴다. 뒤로 물러나며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문득 나는 문의 고향에서 잔치 때 송화 가루로 만든 다식을 먹은 기억이 난다. 꿀을 넣어 달기는 하지만 약간 매캐하며 한약을 먹는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농사를 짓지 않아서 그런지 마당과 뜰이 모두 정갈하나 집안이 너무 괴괴하다. 윗방으로 들어가니 기영 군이 쓰는 방인 듯 교과서가 놓인 작은 책상이 있고 벽 구석에 작은 책장이 있는데 한서가 쌓여있다. 몇 권을 들추어보니 논어 소학, 명심보감이다. 기영 군은 눈을 크게 뜨며 한문을 배웠느냐고 묻는다. 나는 열적은 모습으로 계명편과 통감을 읽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기는 얼마 못 읽었다고 말을 한다. 나는 사서를 못 읽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1923년경 선생은 지역사회에 큰일을 하셨다. 그것은 왜정이 고적(古蹟)을 없애려는 술책으로 망선루(望仙樓)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왜경의 훈련도장인 무덕전(武德殿)을 짓겠다고 공포하였다. 이는 우리 읍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힘이 없고 경제가 넉넉지 못한 우리 사회 인사들은 울분을 금치 못하였다. 선생께서 여러 모로 궁리하신 끝에 먼저 청년회원을 모아 놓으시고 망선루(望仙樓)가 청주를 대표할 만한 고대 고적(古蹟)건물로 이를 보전함이 우리들의 할 일이라고 설명하셨다.
망선루를 현 청남학교 마당으로 옮겨 새우면 고적도 보전되고 학교 교사(校舍)로도 쓰이게 되니 좋을 것이라고 설득을 하여 회원들이 모두 기부금(寄附金)을 내었다. 또한 일반 유지(有志)를 찾아 설득을 하니 모두가 찬성하여 그 중에도 이동현, 정규택 선생과 이명구 선생, 김철환 선생, 방인혁 선생 등이 솔선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여 대금을 지불하고 현 위치에 세운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공로를 크게 인정하였으나 근대에 와서 건물 구조가 변형이 되어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며 고적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그러나 지금 천 년 전의 경주사적지를 찾아 건물을 재건하려는 고적(古蹟) 복원(復元)에 비하면 이는 건축물도 근소(僅少)하려니와 고려시대 건축양식이 허다하게 각지에 보전되어 있는 이상 재건에 있어 건축비만 주선이 되면 난제(難題)를 핑계할 조건이 없다. 큰 예산이 소요되는 것이 아닌 만큼 수월하게 적지(適地)를 물색(物色)하여 옛 망선루(望仙樓)를 복원(復元)토록 함이 좋다고 본다.
나는 어린 소년으로 유년주일학교 출석은 물론 낮 2시 성인들의 예배시간에도 어린 소년으로서는 유일하게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이는 누가 권한 것이 아니고 자발적인 예배참석이다. 왜 그리하였는가? 곰곰이 생각하면 유년집회는 설교나 가르침이 너무 단순하여 내 스스로 성인 예배 참석을 하여 만족을 얻고 있었다. 이는 필시 다소 조숙한 탓인 듯도 하다. 그런 중에 주일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어느 선생에게 김태희 선생의 일화를 들었다. 그 당시 듣는 나에게는 아주 흐뭇한 이야기다. 선생이 현재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책벌(責罰)을 당하여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듣는 순간 나는 반감(反感)이 났다. 그렇게 훌륭한 어른이 책벌(責罰)을 당하다니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너무나 뜻밖의 말이어서 매우 의아스러워 캐물으니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노아 선교사가 집회를 열었고 성인반 성경공부를 하는데 예화(例話)를 들어 말하는 중에, 조선나라 백성이 죄를 많이 지어서 죄 값으로 나라가 망한 것이라고 했다 한다. 강의를 받으시던 선생은 대노(大怒)하여 “우리가 어찌하다 나라를 잃고 이 고생을 하는데 동정은 못할망정 죄 값으로 망하였다니 그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선교사로서 우리 민족을 이 정도밖에 이해를 못하는가?” 하며 강의석을 물러 나오셨다 한다.
선생은 그 후로 일체 예배(禮拜) 출석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선교사의 책벌(責罰)이 과실(過失)로 인정되고 다시 출석을 하여 내가 11세 되던 해에 주일 정식 예배석에서 최영택 목사와 소열도 선교사, 장로들이 단상에 모여 안수 예식을 함으로 장립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후 장자인 기택(基澤)씨는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고, 차남 기영(基榮)군도 집을 나가고, 막내가 있으나 가계의 보탬이 안 되고 양봉(養蜂)도 여의치 않아 살림이 어려워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충남 신탄진으로 이사를 가셨다. 그 곳에 가서도 인심은 있게 마련, 온 동네가 수해(水害)를 당하였는데 선생이 나서서 크게 구조하여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에 지기지우(知己之友)한 사람의 위문도 받지 못하시고 객지에서 운명하셨다. 매양 지켜보아도 열사(烈士)나 지사(志士)의 말로(末路)가 비참하기만 하니 이는 하늘의 뜻인가 벗들의 버림인가 애석하기만 하다. 여러 해 후에 선생을 흠모하는 인사들이 고향 운암리(雲岩里)로 유택(幽宅)을 옮겼다.
소봉 이창수 장로는 1912년 9월 1일 생으로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 164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현재는 서울에서 거주하고 계시다.
* 蘇峰 李昌秀『回想錄』계명사,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