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청주소식/ 9. 경비군대 배치, 충남과 충북/ 10. 청주산상에 불 피우고/ 11. 헌병을 파송/ 12. 청주의 경계 기마헌병이 출동/ 13. 청주 밤마다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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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소식

1907년 7월 29일 소식통에 따르면 청주지방에서는 선생과 유생들이 모여 비밀히 논의하고 있고, 예수교인들도 곳곳에 모여 논의, 의견이 일치 되여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반대할 운동 중이며, 일본군인 1개 소대가 청주에 와서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고로, 우리지방 군인들은 부대 내에 모여 위험한 소문이 있는데 그 부대장은 우리 군인들에게 부대에서 일체 밖에 나가지 못하게 명령하였으며, 청주 시민들이 격분하는 바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로 임용하는 것은 한국이 망한 날이라고 대단히 격분하고 있으나, 일본군인 때문에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못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共立新報』 1907.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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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과 충북에 경비군대 배치충남 충북 도 경찰국에서는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대구에 있는 일본군 80연대에 청하여 경비군을 주둔시키도록 되어 있었기에, 13일 대구로부터 58명은 충북 충주로 가고, 대전에 있는 일본군 3대대 장병 25명은 공주로 갔다고 한다.

*『每日申報』 1919.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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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산 정상에 봉화를 올리고 (3월) 23일 오후 11시경부터 조치원에서 동남쪽으로 15리 (약5.8km)되는 청주군 강내면의 일대 20리 (약7.8km) 되는 지역에서 산상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연속 부르며 조치원을 향하여 달려왔는데 그 인원수를 확실히 알 수 없으나 2,3천 명 가량으로 보고 있다, 조치원에서는 소방대원까지 소집하여 놓고 만일의 사태에 경계하는 중인데, 조치원읍내에는 민심이 소란하다 한다. (24일 조치원 통신)

*『每日申報』 1919.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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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헌병을 파견23일 오후 11시경에 조치원부근 산 위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또 오송(五松) 경찰지서 부근에서도 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는 급보를 접하고 조치원 헌병파견대에서는 헌병을 출동시켰다 한다.

*『每日申報』 1919.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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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의 경계 기마헌병이 출동충청북도 괴산의 소요에 이어 청안과, 진천군에서도 소요가 있었는데, 22일은 청주의 장날이라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고 있어서, 경찰과 헌병들이 경계를 엄중히 하며 일개중대의 경비병이 각처를 경비하고 있어, 궐기대회가 연기되었다.  당일 아침 일찍부터 기마병과 순경들로 하여금 시내를 경계케 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어서 다행히 평온 하였다 한다.

*『每日申報』 1919.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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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밤마다 소요

청주군 강내면, 강외면, 옥산면의 소요자들은 23일 밤 산 위에서 봉화 불을 놓고 소요를 일으킨 이래로 밤마다 마찬가지로 야단을 치는 고로 경찰서장은 27일 아침에 경찰관 수십 명과 함께 자동차로 오송리에 가서 청주경비대와 협력하여 대대적인 수색을 한 결과 주모자 5명을 검거하고 계속 경계 중이라 한다.

*『每日申報』 1919.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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